다른 명령
카말(KAMAAL) - 'Paper mache' 인터뷰 - by DanceD
힙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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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66 2013-03-29 11:06:05
- 인터뷰어와 카말의 친한 관계 때문에 경어는 생략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DanceD (이하 D) : 우선 인사 부탁드려요.
카말 (이하 카)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얼마 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늦깎이 신인 엠씨 카말입니다.
D :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요즘 근황이 어떻게 되세요? 앨범이 네이버 이주의 발견에도 선정 되었는데...
카 : 난 똑같아. 일하고, 애기 키우면서… 아 네이버 이주의 발견, 기분 좋은 해프닝 이였지. 나도 모르고 있다가 네이버 들어갔다가 놀랐어. 10년 만에 군대 동기한테 전화가 오기도 하고 (웃음). 음악적으로는 밴드를 꾸렸어. 꾸린지는 한 3주 됐는데, 주말마다 밴드 연습하고 있고, 쇼케이스도 밴드 형식으로 준비 중이야. 밴드 이름은 원래 '그날 이후'로 하려고 했는데…
D : 아, 가리온 노래 제목에서 가져온 거예요?
카 : 그렇지. 근데 멤버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결국 '공중그네'가 됐어. 내 앨범 첫 번째 트랙 제목이기도 하고. 당분간은 '카말과 공중그네'로 활동할 계획이야. 개인적으로는 루츠(The Roots) 같은 재즈 힙합 밴드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런 아우라를 쉽게 얻을 수 있겠어. 누군가를 따라하다간 내가 바라는 수준에 아예 못 미칠 거 같아서 일단은 어쿠스틱 힙합 밴드라는 개념만 가지고 우리들만의 느낌을 담아서 밴드 색깔을 만들어 보려고.
D : 그럼 '공중그네'란 이름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카 :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멤버들이 모여서 밴드 이름을 정할 때 누가 "공중그네로 해요!" "좋아! 좋아!" 뭐 이렇게 결정 되어버렸어. (웃음). 스윙감있는 유쾌한 밴드 이름 같기도 하고 어감이 예쁘잖아. 개인적으로는 "그날 이후"에 미련이 남는 게 선배들에 대한 리스펙의 의미가 깃들어있는 게 좋은 거 같아서… 근데 멤버들의 반대도 그렇고 이미 '그날 이후'라는 밴드가 이미 있다고도 하데. 사실 후보 중에 '생명수'도 있었는데 (웃음)
D : 가리온에 대한 리스펙을 아낌없이 보여주시네요.
카 : 그렇지.
D : 이름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형 랩네임이 되게 많아요. 맨 처음 아실바니안 코끼리를 만들었을 때는 '까마귀'였고 그 후 '아코의 까마귀'였다가 지금은 'Kamaal'이죠. 무슨 의미가 있나요?
카 : 많기는커녕 쭉 하나였는데… 큰 의미가 있을 리가(웃음). 까마귀라는 이름도 큰 의미를 두고 지은 건 아니고 아코의 까마귀도 그때 즈음 다들 날보고 '이 형이 아코의 까마귀야'라고 소개를 하기에 그냥 그걸 이름으로 썼을 뿐이지. 처음 까마귀라고 이름 지은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 즈음에 별명을 그대로 닉네임으로 쓰는 게 유행 이였어. 난 중학교 때 별명은 산도깨비였고 고등학교 때는 푸우였거든. 근데 푸우는 왠지 닉네임이 있을 거 같고 산도깨비는 맘에 안 들었어. 그래서 다른 별명을 찾았는데 어렸을 때 내가 엄청 개구쟁이였거든. 항상 동네 친구들이랑 담 타고 넘어가서 고물상 공터에서 야구하느라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시커맸어. 그때마다 어머니가 씻겨주시면서 "아이고 우리 까마귀, 우리 까마귀새끼"하시곤 했는데 그 때 기억이 나더라고. 나한테 까마귀라고 불러주는 건 우리 어머니 밖에 없었지만 나한테는 꽤 좋은 기억의 별명 이였어. 그래서 그때부터 까마귀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지. 한글 태깅 연습도 하고(웃음) 그러다가 Rebelde 앨범 준비할 때 좀 심각하게 이름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어. 아무래도 까마귀를 영어로 표기하기가 힘드니까 스펠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까마귀(Kkamagwi)에서 내식대로 좀 빼고 붙여서 카말(Kamaal)이 된 거지. 고로 카말은 곧 까마귀의 카말식 표기랄까.(웃음)
D : 육아랑 직장 생활 때문에 음악 활동이 좀 어려워지진 않았어요?
카 : 어렵지. 심지어 이번 앨범의 경우를 보면 앨범 작업한다는 기사가 힙플에 2011년 가을에 처음 났는데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1년 4개월 걸렸어. 내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아내와 분담해서 육아를 하는데 주말에 6시간을 아내가 빼줘. 근데 6시간을 녹음에만 쓸 순 없잖아. 아이디어 구상에 계획 짜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이러다보면 1주일에 1벌스가 나와. 그렇게 하다보면 한 달에 한곡씩 이런 식이니 오래 걸린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어.
D : 바쁜 것 외에 음악적으로 결혼하기 전이랑 후랑 변한 게 있나요?
카 : 응 좀 변한 거 같아. 결혼 전에는 얘기를 하려고만 했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려버렸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의 얘기를 듣게 된 거 같아. 자세가 좀 열린 거지. 옛날엔 독선적인 부분이 있었어. BRS 운영할 때도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시간을 단축하려고 독선적이란 소리를 좀 듣더라도 밀어붙였는데 결혼 후부터 조금씩 태도가 변한 거 같아.
D : 가장으로써 좀 부담이 커졌다든지 그런 건 없나요?
카 : 사실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런 건 전혀 못 느끼겠어. 내가 지금 일을 하잖아. 봄, 가을 때는 공사 일이 들어오면 주말에도 나가서 일하고 그래. 직장에, 육아에, 주말엔 부수적인 일에, 밴드까지… 그러다보니 어깨가 무겁다는 둥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없어. 오히려 결혼 전이나 서른 즈음에 삶에 대한 걱정 같은 걸 느꼈던 거 같아.
D : 이제 본론으로 카말의 시작부터 간단하게 얘기를 해볼게요. 힙합을 언제부터 듣게 됐나요?
카 : 우선 힙합을 듣기 전에 난 펑크 키드였어. 지금도 기억나는 게 중학교 때 신문에서 홍대 길거리 공연 기사를 봤는데 펑크 록이 뭔지 되게 궁금해지더라고.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홍대에 갔는데 거기서 크라잉넛, 노브레인, 코코어 같은 1세대 펑크 밴드들의 공연을 봤어. 그 계기로 펑크에 빠져서 머리 빡빡 밀고 바지에 쇠사슬 달고 다니고 무정부주의 표시 그려져 있는 티셔츠 입고 다니고(웃음) 드럭이나 잼머스 같은 밴드 공연하는 클럽에도 자주 갔었어. 중학생 꼬마애가 자주 놀러오니까 당시 밴드 형들이 말도 걸어주고(웃음) 고등학교 막 올라갔을 때던가 당시 록킷(Rockit)이라는 잡지가 잠깐 있었는데 그 잡지는 항상 사은품으로 공짜티켓을 줬어. 그 중에 델리스파이스가 나오는 공연 티켓이 있는 거야. 그래서 그 공짜티켓을 들고 공연 보러 갔는데 무슨 사정이었는지 (아님 내가 날짜를 잘못 알았는지), '힙합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의 공연을 대신 하더라고. 그때 푸른굴 양식장이 마스터플랜으로 이름 바뀐 지 얼마 안됐을 때여서 이런 저런 신선한 공연을 자주하는 거 같더라고. 공연을 묘한 기분으로 보고 있는데 내 또래 친구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는 거야. 물론 가리온, 갱톨릭 같은 형님들도 있었지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 좀 경쟁심도 들고 힙합은 내 또래들이 하는 젊은 음악이라는 느낌이 오더라고. 그전에도 힙합을 듣긴 했지만 Beastie Boys나 Public Enemy, Run DMC 같은 록 음악적인 요소들이 있는 힙합 뮤직이었지. 정통 힙합을 듣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어.
D : 사실 형 또래면 외국 힙합으로 시작을 많이 하는데 특이하게 한국 힙합으로 시작하신 거네요.
카 : 그렇지. 그 당시는 주변에 힙합 관심 있는 사람도 한명도 없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없어졌지만) 영등포 지하상가에 '예술의 전당'이라는 힙합 음반을 많이 보유한 큰 레코드점이 하나 있었어. 한국 힙합은 초창기라 한국 음반은 많이 없고 그러다보니 외국 힙합을 많이 듣게 됐어. 그래서 난 한국 힙합과 외국 힙합에 고루고루 양분을 받게 되었고 덕분에 난 당시 내 또래들이 갖고 있던 한국 힙합에 대한 멸시나 외국 힙합에 대한 찬양같은 편향된 취향을 갖지 않게 되었지.
D : 알고 있기로는 첫 활동이 'iks-Flowa'라는 그룹인 걸로 알고 있어요.
카 : 맞아.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가사 쓰고 랩도 해보고 그랬거든. 그러다가 대학 들어가서 우연한 계기로 힙합 동아리를 나랑 동기들이 만들었어. 근데 동아리 홍보를 하려면 공연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공연을 주구장창 했어. 그때가 또 힙합이 붐이라 그런 자리가 많았는데 아마 강원도 쪽 대학 공연은 다 돌았을걸. (웃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팀이 만들어진 거지. 그때 첼라랑 나랑 친했으니까…
첼라가 힙합을 시작하게 된 재밌는 에피소드가 첼라가 원래 코다라는 대학밴드에서 드럼을 쳤었는데 우리 동아리에 비보잉을 배우겠다고 들어왔었거든. 나랑 첼라랑 성격이 잘 맞아서 자주 붙어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같이 자취를 했어. 그 당시에는 힙합 인스트루멘탈을 구하기가 힘들었어. 근데 공연은 또 해야 하잖아.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무작정 애시드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끙끙되고 있었거든. 근데 그때 전날 술을 많이 먹고 자던 첼라가 갑자기 일어나선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와 보라고 하곤 자기가 만드는 거야. 그리고 난 옆에서 잤지. 근데 잠결에 들어보니까 들을 만하더라고. 그때부터 꼬셨어. 넌 힙합 음악을 해야 한다고 (웃음)
D : 아, iks-Flowa에 김박첼라도 멤버였나요?
카 : 응. 나랑 첼라랑 태흠형 (*아코 원년 멤버인 탬보 태나)
D : 아코랑 같은 구성이네요?
카 : 응 이름만 바뀐 거야. 스타일이 바뀌어서 이름을 바꾼 거지. iks-Flowa는 올드 스쿨이었거든. 아코는 다른 느낌이고.
D : 아실바니안 코끼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된 건가요?
카 : 우선 iks-Flowa는 2001년도 초반에 결성했는데 그해 중순에 내가 급하게 군대를 가게 되면서 활동을 멈췄어. 제대 후에 다시 시작하려는데 내가 없는 동안 첼라도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더라고. 그래서 팀 색깔을 어쿠스틱 음악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바꾸게 됐어. 아실바니안 코끼리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에티오피아의 고대 이름이 '아비시니아'래. 당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국이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블랙 뮤직의 기원이 거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이름을 인용하려 했는데 내 저주받은 기억력 때문에 '아비시니아'를 '아실바니아'라고 잘못 기억한 거야.(웃음) 근데 그걸 활동하는 중에 알게 된 거야. 함부로 말 못 하는 흑역사지.
D : 아, 실존하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웃음) 후에 이름이 Papers로 바뀌지 않았나요?
카 : 일단은 나나 첼라나 아실바니안 코끼리란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어.(웃음)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눈 오는 날에 문득 창밖을 보고 있는데 누가 눈 위에 'XX야 사랑해'라고 글씨를 쓴 걸 보고 첼라한테 바로 전화해서 '스노우 페이퍼 어때?'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첼라가 스노우는 너무 여성적이니까 스노우를 빼고 Papers로 하자고 하더라고.
D : 아실바니안 코끼리 데뷔 전에 김박첼라의 무투 리믹스가 반짝 주목을 받았었죠.
카 : 그 리믹스 컴피티션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지. 내가 2003년 겨울에 제대를 했는데 2004년 봄 되자마자 BRS를 사업자 등록했었어. 마음먹었을 때 확 지르지 않으면 흐지부지해질까봐. 그러고 나서 2년 동안 탬보형이랑 있는 알바 없는 알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 그러면서 돈이라든지 숙소라든지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힙합씬에 어떻게 등장해야할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러던중에 '리드머 컴페티션'을 보고 '이거다!' 싶은 거지. 어느 정도 전략적인 거였어.
D : 어쩌다 BRS 얘기가 나와 버렸네요. (웃음) 말하자면 BRS는 김박첼라가 무투 리믹스로 유명세를 얻기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거네요.
카 : 그럼. 오랫동안 생각을 했지.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첼라나 탬보 형이랑도 계속 소통하고 있었고 음악적인 방향성도 고민했고… 그전부턴 대략적으로 구상만 하다가, 사업자 등록이 계기가 되어서 진지한 자세로 임하기 시작했어.
D :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아실바니안 코끼리 첫 앨범이 나왔어요. 근데 생각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 했죠. 아쉽지 않았나요?
카 : 아쉬웠지. 지금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 길거리나 소극장 공연을 많이 했었거든. 공연할 때는 기타와 젬베, 에그쉐이크 등 소박한 어쿠스틱 구성으로 많이 했는데 앨범은 전자음에 샘플링 같은 게 대부분이었으니 이질감이 들었겠지. 게다가 내 랩이나 탬보형 랩도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기엔 부족했던 거 같아.
D : 저도 무투 리믹스에서 느꼈던 그 감성이 안 나와서 조금 당황했던 거 같아요. 한편으로 이번 앨범에는 당시 앨범의 곡을 편곡한 '어느 멋진 날 2013'이 수록된 걸 보면 첫 데뷔곡이라는 데 애착이 큰 거 같아요.
카 : 내게 '어느 멋진 날'은 첫사랑 같은 노래야. 아코가 맨 처음 만들어진 후부터 수많은 곡들을 만들었는데 다 버려지고 이거 하나 남았어. 그러니 얼마나 뜻 깊겠어.
D : 잠깐 삼천포로 새면 그 앨범 수록곡 중에 'We Gonna Make It'이란 곡이 프리스타일로 만든 곡이라던데 사실인가요?
카 : 사실 '어느 멋진 날'을 제외한 두 곡 다 프리스타일로 녹음했어. 그때 당시 프리스타일에 꽂혀 있어서 말이야. 꼭 쓰고 싶은 라임만 써놓고 내용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마이크 틀어놓고 루프 계속 돌리면서 주구장창 프리스타일 하다가 괜찮은 16마디씩 두 절 잘라서 한 곡을 완성하는 거지. 며칠 동안 프리스타일만 해서 겨우 만들었어. 나중에 공연하려고 그 곡을 듣고 다시 외웠지.(웃음) 어떤 면에서 새로운 방식의 작업 방법 이였지만… 작사적인 면으로만 보면 고민을 충분하게 못했어. 작사가로서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시간을 건너뛴 거야. 앨범 작업이라는 건 치밀하게 박자나 호흡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완성해야 '맞아 이거야'란 느낌의 만족감을 얻게 되는데 두 곡은 그런 게 없어서 들을 때마다 쑥스럽고 어색하고 그래. 반대로 어느 멋진 날은 진짜 고민하고 하면서 녹음한 거라 더 애착이 가는 거 같아.
D : 이후 BRS가 아날로그 소년을 통해 본격적으로 박차고 나갔지만 역시 반응이 금방 오진 못 했어요.
카 : 그때는 내가 너무 바빠서 아쉬워하고 실망할 겨를이 없었어. 음악도 하고 있을뿐더러 BRS를 운영하는 리더였기에 신경 안 쓰고 그냥 앞으로 꿋꿋이 나갔지. 생각해보면 2004년에 창립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거든. 그럼 2006년부터 2010년 해체 때까지 5년 동안 열 장의 앨범이 나왔으니 얼마나 바빴겠어. 게다가 우리 회사가 소규모 회사였기 때문에 제작비 확보부터 계약 홍보까지 외적인 일은 뭐든지 다 내가 해야 했어. 작은 거부터 큰 거까지. 음악적인 부분은 대부분 동생들이 맡았고… 서로 다 바빴지.
D : 그런 시간이 지나 김박첼라와 소리헤다는 씬에서 위치가 많이 성장했잖아요. 감회가 좀 남다를 거 같아요.
카 : 요즘 두 가지를 느껴. 첫 번째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빨리 따라가자.' 나는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거 같아. 아날로그 소년과 김박첼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앨범의 성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투자할 수 있었어. 소리헤다도 그렇고. 아쉽게도 그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요즘 동생들이 잘 되고 있는 거 보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는 거 같아서 기분 좋아. 반면 양날의 칼처럼 동생들 뒷바라지 하다가 내 음악은 항상 뒷전이 되었거든. 당시에도 주변에서 많이들 '왜 네 음악은 안 하냐'고 질타했었어. 근데 내가 한 번에 두 가지를 잘 못하는 성격도 한 이유고… 내가 음악에만 집중하면 BRS가 나한테 치우칠 것도 같고… 그땐 그랬어. 이젠 따라가야지. 난 나만의 속도와 방향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D : 얘기가 나온 김에 최근 있었던 소리헤다에 관한 논란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카 : 요즘 한풀 꺾이긴 했지만 예민한 부분이라 함부로 왈가왈부할 순 없는데 일단 소리헤다의 음악에 대한 얘기보다 태도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있어. 형으로써 변명(?)하자면 소리헤다가 인터뷰할 때 문제 삼고 있는 '감옥 갔다 오겠다'는 발언이 소리헤다를 아는 사람이면 왜 쟤가 저랬는지 다들 알거야. 일단 소리헤다가 말주변이 없어. 클리어에 대해서 언젠가 책임지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표현을 좀 격하게 한 거 같아. 그걸 글로 읽으니까 당연히 건방지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소리헤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대화해보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거든. 그리고 인터뷰한 시기가 약간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소리헤다가 앨범 두 장이 다 성공하면서 자신감에 많이 차있었어. 그때쯤 주변 사람들은 다들 걱정할 정도였는데 그래서 말 속에 과한 자신감이 들어간 거 같아. 지금은 안 그런데… 좀 아쉽지 '아 저때 인터뷰하면 안 됐는데…'하는 생각이드네.(침묵) 근데 솔직히 젊은 음악가가 자신감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소리헤다 사건의 논점도 너무 다각적이라서 잘 모르겠어. 너무 복합적인 거 같아. 누구는 소리헤다의 음악을, 누구는 태도를, 누구는 법적인 부분을 갖고 지적하니까. 누구 말이 옳고 그른지 잘 모르겠어.
D : 다시 원래로 돌아와서, 원래 아코의 앨범이 예정되어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근데 결국 나오기 전에 BRS가 사라졌고 형의 앨범이 마지막이 되었어요. 아코의 앨범은 왜 무산된건가요?
카 : 아코의 앨범은 되게 실험적으로 하고 싶었어. 기타에 콘트라베이스, 카혼과 젬베 등을 갖춘 어쿠스틱 밴드 형식의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꾸리기가 쉽지 않더라고. 꾸릴 수만 있다면 상당한 수준이 됐을 텐데… 그 당시 첼라랑 나랑 젬베 치는 바투라는 형이랑 돌아다니면서 소극장 공연을 했는데 그게 음반 작업과 병행해서 하는 게 아니라 공연만 하다보니까 다시 음반에 대한 욕구가 생겼어. 그 욕구로 나온 게 아날로그소년의 [행진] 앨범이었고 대신 아코 앨범 얘기가 사라졌던 거 같아.
D : 형 본인은 아쉽지 않았어요? 얘기가 사라졌다는 게?
카 : 사실 내 음악에 대해 욕심을 부리게 된 게 얼마 안 돼. BRS에서 나오는 음반이 다 내 것처럼 소중했거든. 해체하면서 정신이 든 거지, '아! 진짜 내 것은 얼마 없구나.' 좋게 말하면 이타적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내가 내 밥그릇 못 챙긴 거고.
D : 그래서 'Hardworks'라는 레이블을 이번에 새로 만드신 건가요?
카 : BRS가 해체한 건 맞지만 내가 레이블을 새로 만든 건 또 아니야. 새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실 BRS의 이름만 바꾼 거야. BRS 멤버들이 없는 BRS, 특히 처음부터 함께 해왔던 첼라가 없는 BRS는 상상하기 힘들어서 이름을 바꾼 거지.
D :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BRS를 해체할 맘이 없으셨던 거 같아요.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는 뭔가요?
카 : 사실 그 즈음에 다들 BRS 탈퇴 얘기를 자주 하곤 했었어. 자기네들의 생활권보장에 대해서도 자주 요구했었고. 다들 입지가 많이 커지면서 BRS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거 같아. 뭐 내 운영방식에 불만도 당연히 있었던 거 같고 마침 결혼을 하게 되는 나를 불안해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이래저래 탈퇴를 원하게 된 거지. 뭐 더 좋은 조건을 요구하는 건 나쁜 게 아니고 당연한 거니까…. 근데 난 아무것도 약속할 수가 없었어. 거짓말은 또 하기 싫었고…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던 거지. 나도 맨 처음엔 서운한 마음에 화가 많이 났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동생들이 더 걱정됐어. 우리 관계가 단체 탈퇴로 끝나버리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동생들이 날 이용해먹은 것처럼 비춰질 수 있겠다 싶더라고. 근데 희한한 게 내가 동생들을 나무라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동생들을 나쁘게 보는 건 또 싫어.(웃음) 그래서 마지막으로 큰형으로써 마음을 쓰고 싶었어. BRS를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보기 좋은 결말이라 보고 결정을 내린 거지.
D : 해체에 대한 다른 멤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카 : 다들 그러자고 했어. 내 앨범 나오면 언제가 되든 굿바이공연도 하자고 했었고 첼라와 헤다도 내 솔로 앨범 작업에 적극 도와주기로 약속하기도 했었고. 물론 헤다는 물밀 듯 들어오는 외주 작업 때문에 그 약속을 못 지켰지만… 나쁜 놈…(웃음) 걔네도 나를 배려하는 거 같았고 좋게 마무리 했었지.
D : 긴 얘기 끝에 드디어 솔로 앨범에 대한 얘기로 들어왔어요. 우선 앨범 제목 [Paper Mache]가 무슨 뜻인가요?
카 : 우선 페이퍼 마세는 종이 공예품이란 뜻이야. 아코가 Papers로 이름을 바꿨지만 결국 페이퍼스 이름으로 된 결과물이 하나도 없이 해체하게 된 게 아쉬워서 꼭 Paper란 단어를 쓰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가사를 종이에 쓰거든. 2004년부터 내가 종이에 써온 가사가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서 앨범을 만들었으니까 내 앨범 자체가 '종이 공예품'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D : 앨범 자켓에도 고래가 있고 '오에아' 가사에도 고래가 나와요. 아무래도 고래가 본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카 : 그렇지. 오에아에 나오듯이 '어항 속에 살 수 없는 고래 같은 괴물'이라는 그 구절이 내 청춘을 대변한다고 생각해. 아무도 나를 혹은 우리를 말릴 수 없고 누가 뭐라던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만의 길을 가는 길들여지지 않는 녀석들이였으니까. 그래서 디자인하는 친구가 앨범을 대표하는 문구나 단어가 있냐고 물어봤을 때 그 구절을 말해줬더니 오브제로 고래 페이퍼 마세를 만들어준 거야.
D : 개인적으로 앨범 나오기 전 트랙들인 'Stone Rockin’이나 믹스테이프 'B', 그리고 '불의 꿈'을 들으면서 형의 솔로 앨범은 되게 공격적일 거라 예상했어요. 그런데 이번 앨범 분위기는 그런 것보다는 더 편안하고 친숙한 이미지에요. 실제로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만든 건가요?
카 : 편안해진 게 맞아. 일단 내가 공격적인 시기가 지났어. 가사나 노래 같은 건 나한테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건데 그런 성향이 사라졌으니… 일부러 만들어낼 수도 없는 거고.(웃음) 어느 순간이 되니까 과거에 내 과격하고 공격적인 모습들이 창피하고 철없어 보이더라고. 물론 곡들은 예전에 만들어 놓은 노래들이지만 최대한 지금의 내 모습을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한 앨범이야.
D : 그럼에도 '오에아' 노래 가사에서는 여전히 '붉은색 시구절'이란 표현을 쓰셨는데요.
카 : 그건 날 상징하는 구절이라 생각해. 기본적인 성향은 바꿀 수가 없는 거 같아. 내가 자주하는 말 중 하나가 ‘내가 30평생을 반항아로 살았는데’야. 진짜로 내가 반항아로 살았다는 게 아니고 사회가 정해놓은 옳은 삶의 방식에 항상 의심해보고 다른 게 행동해보려고 노력해왔거든. 정치적 성향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 앨범을 들어보면 사회성을 담으려고 많이 노력했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인 요소들은 직장인의 삶과 같이 친근한 표현으로 정치적인 요소들은 최대한 시적으로 혹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예전에는 선전이라도 하듯이 평소에도 가사에도 내 정치적인 성향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이제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고 간접적으로 은유적으로 의미를 숨기는 게 더 태도로도 음악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해.
D : 이번 앨범에서 아주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곡들도 담겨 있어요. 'Ain’t No Stoppin'이 대표적인 곡이고요.
카 : 그것도 2절을 보면 메시지가 담겨져 있긴 한데 네 말도 맞아. 비트는 새롭게 만든 거긴 하지만 가사는 소리헤다랑 자이브스텝(Jive Step)이란 프로젝트 작업할 때 써놓은 거야. DJ Magik Cool J형이라 함께한 'Beautiful Mind' 빼고 내 앨범의 반은 김박첼라, 반은 소리헤다랑 한 건데, 소리헤다랑 한 건 다 자이브스탭 때 곡이야. 또 자이브스탭 자체가 재밌는 걸 해보자 란 콘셉트이어서 곡도 그렇게 나온 거 같아.
D : 직접 일하는 데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 뮤직비디오를 찍었는데 어떤 계기였나요?
카 : 아까 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데 일단 뮤지션은 결과물 속에 자기의 삶을 솔직하게 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영상 속에도 내 일터를 잘 담아보고 싶었어. 일단 개인적으로 그 장소를 좋아하거든. 그리고 영상이 갖고 있는 힘이나 앞으로의 방향성 같은 걸 좀 실험해보고 싶기도 했었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재밌는 흐름이 생길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런 이유에서 내 삶의 배경이었던 영등포는 계속 내 영상에 배경이 될 것 같아. (웃음)
D : '오에아'의 뮤직비디오도 그런 맥락에서 찍게 된 건가요?
카 : 내 생각에 '오에아'는 지금까지 내 최고의 곡이야. 노래 속의 화자는 약간 농담도 섞여있지만 전체적으로 진지한 어조로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의 인디뮤지션과 같이 가난하고 배고팠던 무명 아티스트의 삶을 그래피티 태거에 비춰서 표현했는데 첼라와 내가 20대 내내 고민했던 가장 우리 BRS다운 가장 우리 본연의 색깔을 담고 있어. 일단 곡이 애착이 가기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만든 거지. 근데 사실 예산이 부족해서 뮤직비디오를 못 찍을 뻔했는데 킹더형이 있을 때부터 친했던 찬주엘즈(Chanjuelz)가 도와준 덕분에 저예산으로 잘 찍었지. 애착도 애착이지만 많은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싶었어. 내 생각처럼 많은 사람들이 들은 건 아닌 거 같지만…(웃음) 곡이 예전에 만든 거여서 지금 사람들이 공감을 못 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오에아'와 같은 노래가 가진 힘을 알리고 싶었어. 요즘 여느 노래처럼 화려하거나 ill하고 cool하진 않지만 '오에아'는 솔직함을 갖고 있어. 난 솔직함이 갖고 있는 힘이 멋지다고 생각해.
D : 앨범 전체적 분위기를 볼 때 첫 싱글 컷이 '불의 꿈'이었던 건 의외에요. 전체 색깔에서 많이 튀는 편인데.
카 : '불의 꿈'은 5월 18일에 디지털 싱글로 발표했는데 5.18에 앨범을 내보고 싶었거든. 그 날짜가 주는 의미가 있으니까. 근데 앨범이 덜 완성되어 앨범 발표는 못 하겠고 그래서 싱글로 나온 거지.
D : 그렇다면 'Paper Mache'의 일부라기보다는 '불의 꿈' 자체인 건가요?
카 : 응. 5.18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거지. 사람들이 적어도 내 후배들이나 친구들은 '아 카말이 5.18때 불의 꿈 싱글을 냈었지'하고 기억해주겠지.
D : 생각해보면 그다음 선 공개곡이었던 '공중그네'는 앨범 색깔을 잘 반영하고 있네요.
카 : 그 곡이 내가 첼라랑 마지막으로 만든 곡이야. 공중그네가 지금의 나와 가장 비슷한 느낌의 노래랄까. 그 느낌이 지금까지 쭉 이어오는 거 같아. 이전에 했던 집회하러 다니고 진보 선전하고 다닐 때의 느낌을 지금은 못 갖겠어. 최근 들어서는 자신의 색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약간의 의미를 숨기는 게 좋은 거 같아. '나는 검은색이야', '나는 흰색이야', 이런 거보다 '저 사람이 검은색인가? 아님 흰색인가?' 이렇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거지. 나는 랩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게 문학으로써의 랩이 가져야할 자세인 거 같기도 해. 깨달았다면 깨달은 거지.
D : 피쳐링진 중 The Z와 Elcue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힙합에서 멀어진 아티스트를 설득해서 섭외한 것 같은… (웃음)
카 : 일단 둘 다 친해. 엘큐는 같은 동네 살아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나서 놀고… The Z형은 예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내 앨범 작업하면 더 친해졌어. 난 둘이 너무 좋은데 요즘 활동 안 하는 게 아쉬워서 더 내 앨범에 참여시키고 싶었어. '이 사람들 아직 살아있다'하고 내가 소문을 내고 다니는 샘이지. (웃음) The Z형은 요즘 힙합 음악 말고 다른 데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Rimshot 활동 할 때처럼 일렉트로닉, 하우스… 그래서 힙합씬에는 잘 안 드러나긴 하지만 벨로스라는 이름으로 하우스뮤직 쪽 DJ 활동은 열심히 하고 계셔. Elcue는 INC 활동 끝나고 나서 얼마 전까지 공익이었고 지금은 앨범 작업하고 있어. 고양이 키우면서. (웃음)
D : 그렇게 Elcue와 The Z 외에는 BRS, 바깥에선 Huck P만 참여했고, 프로듀싱 진도 단촐하게 대부분 김박첼라와 소리헤다로 꾸렸어요. 이건 의도된 건가요?
카 : 의도된 거 맞아. 난 랩 피쳐링은 딱 한 곡만 하고, 나머지는 다 내 랩으로 하고 싶었어. 내가 만든 게 많이 쌓여있기도 했지만, 흥행에 대한 부담감 없이 음악적 갈증을 좀 해소해보고 싶었어. 그리고 다른 것보다 기존의 것을 정리하는 개념 이였기 때문에 프로듀싱 진은 많은 고민 없이 꾸려진 거지. 앨범을 기획하는 초반에 첼라가 '형 앨범이니까 형이 하고 싶은 걸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조금 고민했어. 평소에 재즈힙합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다신 못할 먹통 힙합(하드코어 힙합)도 해보고 싶기도 하고… 근데 생각해보니 기존의 곡을 정리해서 내 앨범에 수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거 같은 거야. 그 노래들에 내가 생명력을 불어넣어야할 거 같았어. 그래서 아코와 자이브스텝 때의 결과물들을 최대한 투박하지 않게 정리하기로 했지. 근데 워낙 예전의 거라서 완전히 투박함이 없어지진 않는 듯 해.
D : 그래도 함께 하고 싶었던 뮤지션이 있을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형이 BRS에서 외부와 가장 콜라보가 적었는걸요 (웃음)
카 : 엠씨로는 UMC 형, 프로듀서로는 Mild Beats 형, 팀으로는 The Z 형이랑 People Under the Stairs 같은 올드스쿨한 팀을 해보고 싶어. 유형은 일단 정치적인 생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비슷한 거 같아서 한곡 해보고 싶고 일두형(마일드비츠)은 소리헤다랑 친해서 연남동 작업실에서 종종 뵙곤 했는데 뵐 때마다 뭔가 도인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예전부터 팬이었지만 실제로 뵈면서 느꼈던 아우라가 더해져서 멋진 인상을 받았지. 그리고 요즘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 중 한명이 The Z 형인데 내가 아는 한 가장 쿨한 성격의 소유자야. The Z형이랑 있으면 뭐든 재미 있어서 팀도 같이 해보고 싶어. 지금 얘기 중인데 아마 빠르면 여름 정도에 부담 없이 믹스테잎 같은 형태로 뭐가 하나 나올 듯싶어.
D : 이제 이 앨범으로 '카말과 공중그네'가 활동을 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신곡으로 하게 되는 건가요?
카 : 일단은 활동은 페이퍼 마세 수록곡들로 하게 될 거 같아. 신곡은 요즘 기타 치는 친구가 작업하고 있어. 쇼케이스가 끝나고 나서 완성시킬 예정이야.
D : 한창 편곡하느라 바쁘시겠네요. 오래 작업한 앨범인 만큼 아쉬운 점도 많지 않나요?
카 : 아쉽지. 녹음은 오랜 기간했는데 믹싱, 마스터링 기간이 좀 짧았어. 그래서 그런지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들지가 않더라고. 엔지니어의 실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고, 내가 소리를 구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의사가 100% 전달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소리가 정확하게 구현되지 않아도 엔지니어들과 적절하게 타협을 봤어. 게다가 원작자인 첼라랑 같이 모니터링을 하는데, 첼라랑 나랑도 생각이 좀 다르더라고. 그러니까 첼라랑 나랑 엔지니어, 이 셋의 의견을 서로서로 적절하게 밀고 당겨서 타협점을 찾은 거지. 그래서 몇몇 곡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게 완성된 부분이 있지. 근데 그게 그 곡의 운명인거 같아. 아쉽지만 받아들이고 다음 작업 때 보완해야지.
D :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된 선까지, 공개할 수 있는 만큼 말해주신다면?
카 : 일단 4월 6일에 쇼케이스. 무대륙이라고 예전에 인디언팜 첫 공연했던 상수동에 있던 카페인데, 지금은 화력발전소 쪽으로 이사 갔는데 이사 가면서 더 좋아졌어. 거기 사장님이 좋으신 분이시기도 하고 장소가 좋기도 해서 우리 밴드는 무대륙에서 꾸준히 공연할 거 같아. 이후 밴드 공중그네로 싱글 같은 작업물을 차근차근 낼 거고 카페나 소극장 공연도 꾸준히 할 거야. 개인적으로는 The Z 형이랑 프로젝트할 거 같고… 그리고 또 내가 공연 기획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라고 힙합밴드끼리 모여서 공연을 하는 거야. 맨 마지막에 다 나와서 난장, 잼도 하고. 규모는 작게 꾸준히 해볼라고.
D : 누벨바그가 생각나네요. 근데 그거보단 한 단계 더 나아간 거 같아요.
카 : 그렇지. 난 이런 방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해. 디제이와 함께하는 공연, 밴드와 함께하는 공연, 내 경우에는 후자를 선호하지. 내가 음악적으로 어쿠스틱한 취향이기도 하고… 라이브에서 또 다른 느낌으로 편곡도 가능한 밴드로의 공연이 재밌는 거 같아. (*누벨바그: 인디언 팜, 피노다인, Cloudancer 등이 속해있는 크루로 어쿠스틱 음악을 하는 크루)
D : 그래도 일단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서 이전처럼 공연을 활발히는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카 : 이전에도 공연이 활발하진 않았어. 공연이 많이 들어오면 편이 아니여서… (웃음) 물론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니까 한번 할 때 이왕이면 좀 신선하고 재밌는 공연을 만들어서 해보려해. 양보단 질이랄까.
D : 정말 긴 얘기 나눴는데, 혹시 더 하고 싶은 말 있으신지…
카 : 늦게나마 솔로 데뷔하게 되어서 감회가 새로운데 이제는 운영자로서의 카말이 아니고 뮤지션으로서 봐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지금 역할이 여럿이니까. 일단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뮤지션으로서도 본분에 열심히 임할 거야. 그러면서 '아 저 사람 정말 열심히 사는 구나.' 소리도 듣고 싶고 나처럼 일하면서 열심히 음악 하는 친구한테 모범이 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제 앨범과 공연 잘 부탁드립니다. (웃음)
D : 그럴 수 있길 응원할게요. (웃음)
인터뷰 진행 | DanceD 권우찬 ([email protected]) 사진 출처 | Photo by 이종필 @ 스튜디오 노마드 관련링크 | 카말 블로그( | http://blog.naver.com/… 카말 트위터( | http://twitter.com/… 카말 페이스북( | http://www.facebook.com/…
15 Comments 김민호
2013-03-31 04:53:31
쩐당
김성용
2013-03-31 13:29:34
음악너무좋네요.
bottle_box
2013-03-29 19:22:14
몰랐던 정보 많이 알아가네요 :) 저도 이번 카말 앨범 너무 좋게 들었어요! BRS 컴필앨범에서 보여준 카말님의 모습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됬다고 해야되나?ㅋ 특히 '잠시만' 이랑 '두비둡'! 다음 앨범 기대하겠습니다!!
poundg
2013-03-29 21:04:54
예전부터 아코의까마귀음악 들었었는데 이번앨범도 잘 들었습니다. 근데 리뷰읽으면서 깝놀랜게... 댄스디님의 힙지식에대해 놀랬네요. 저도 어느정도 힙합 들었다생각했는데 지식이 너무 방대하시네요
얼티
2013-03-29 21:55:07
잘 읽었습니다
빵빵
2013-03-29 22:01:39
잘 읽었습니다.ㅎㅎ
신동훈
2013-03-29 22:37:53
BRS레코드란 곳을 아날로그소년 [행진]이란 앨범으로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카말이란 뮤지션을 알게되었습니다. 솔직히 카말님을 잘 몰랐는데, 이번 인터뷰와 음악으로 더깊은 음악세계와 랩스타일,등을 더자세히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것 같습니다.ㅎㅎㅎㅎ 앞으로 카말이란 뮤지션의 행보와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음악 많이 만들어주세요~~!
엄기용
2013-03-30 11:34:09
신인인줄 알았는데 이런 반전이.. 음악 굉장히 좋네요., 앞으로의 행보 기대하겠습니다.
최정훈
2013-04-01 17:33:36
꼭 성공 하게 될껍니다!!화이팅!! 기대만땅합니다!
raccoongeem
2013-04-02 14:04:56
오 ㅋㅋㅋ감회가 새롭다
none
2013-04-02 10:04:19
댄스디님이 인터뷰하셨네요 ㅋㅋㅋ
박현수
2013-04-05 15:50:00
인터뷰를 보고 카말이라는 사람을 처음보는데 인터뷰를 보고 카말이라는 분 노래를 들으니까좋은노래 같네요 화이팅
도레미도
2013-04-05 19:13:44
편한 인터뷰 방식 좋네요ㅋㅋㅋ 카말이라는 뮤지션 잘 몰랐는데 인터뷰와 동영상 보니 다른 노래도 듣고 싶어지네요 마지막에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뮤지션으로서도 본분에 열심히 임할 거야 라는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열심히 사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당 화이팅!!
조경준
2013-04-10 03:10:07
서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터뷰 방식부터 되게 신선하고 마음에 들어요. 제작년에 BRS레코드 헤체되고 나서 야코의 까마귀님을 다시 못보는 건가 하면서 아쉬웠는데 BRS레코드 헤체 배경부터 지금 앨범에 대해서 또 뮤지션으로써 음악에 대해 열정적이면서도 가장으로써 가정을 지키는 멋진 아버지의 모습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셔서 인터뷰 읽는 내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봐도 카말 님이 생각이 정말 깊으신거 같네요. ^^
BentleMAXX
2013-04-12 09:31:36
인터뷰를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주고받은 방식이 카말이라는 아티스트를 좀더 친근하고 다가가기 쉽게 느껴졌고요, 내용을 보니 음악생활을 하시면서 닉네임도 여러번 바뀌고 그에 따라 여러가지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달려오신거 같습니다. 또, BRS레코드를 해체되었는데도 끝까지 소속아티스트였던 동생들을 걱정하면서 생각해준다는 부분이 정말 감동적이었던거 같아요. 그리고, 가정도 꾸리시고 직장도 있으셔서 시간도 없고 되게 바쁘실거같은데 13트랙이나 되는 정규앨범도 내시고.. 정말 음악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신거 같아서 본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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