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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ress Hill - Black Sunday
강일권 작성 | 2020-08-18 20:16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8 | 스크랩스크랩 | 8,817 View
Artist: Cypress Hill
Album: Black Sunday
Released: 1993-07-20
Rating: RRRR+
Reviewer: 강일권
대마는 미국 힙합의 주요 오브젝트 중 하나다. 거의 모든 래퍼가 대마초를 피우고 찬미하며, 흡연의 희열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다. 이제 힙합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대마초는 유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업으로까지 확장됐다. 대표적인 애연가 스눕 독(Snoop Dogg)을 비롯한 많은 아티스트가 브랜드를 론칭하고 각자의 대마 왕국을 건설 중이다.
비리얼(B-Real), 디제이 먹스(DJ Muggs), 센 독(Sen Dog), 에릭 보보(Eric Bobo)로 구성된 싸이프레스 힐(Cypress Hill)은 오늘날처럼 대마가 힙합의 핵심 컨텐츠가 되기 훨씬 전부터 '대마 찬가'를 불러왔다. 이를테면, 그들은 '대마 힙합'의 선구자들이다. 1990년대 초입부터 대마초에 대한 사랑과 가치를 설파하고, 대마초 합법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1991년에 발표된 데뷔작 [Cypress Hill]은 이상의 세계관을 전례 없이 펑키한 비트에 담아낸 앨범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엔 더욱 끝내주는 작품이 탄생한다. 두 번째 앨범 [Black Sunday]. 세 번째 앨범인 [III: Temples of Boom]과 함께 그룹의 최고작을 다투는 작품이다. 일단 비리얼의 랩부터 독보적이다. 기계로 변조를 가한 것이라 해도 믿을만큼 독특한 톤을 지녔다. 앵앵거리듯 콧소리를 섞어 내는 톤으로 빠르게, 그리고 단어를 움켜쥐고 쥐어짜듯 내뱉는다.
이처럼 신선하면서도 조금은 기괴한 랩 속에 직설과 은유를 오가며 폭력적인 자기과시와 대마 이야기를 담아냈다. 인종차별 아래 부당한 검색을 일삼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개성은 덜하지만, 터프한 맛을 지닌 센 독의 랩이 보조를 맞추어 그룹만의 독특한 랩 세계가 잘 구축됐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트럼펫을 불어(*필자 주: 파이프로 대마초 피우는 것을 비유), Like Louie Armstrong, played the trumpet / 내 파이프 좀 피우고나서 너도 좀 줄게, l’ll hit that bong and break you off something / 내게 경의를 표해야 해, Soon I got to get my props / 경찰들은 내게 와서 약을 빼앗으려 하지, Cops, come and try to snatch my crops / 경찰 새끼들은 내 집을 날려버리려고 한다고, These pigs wanna blow my house down’ -"Insane In The Brain" 중
싸이프레스 힐의 대마 사랑은 비단 가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프로듀싱을 책임진 먹스의 비트는 흡사 자욱한 대마 연기와 흡연의 희열을 음악으로 고스란히 구현한 것과 같다. 비리얼의 독보적인 랩이 취기를 한껏 올리면, 먹스의 비트는 아예 만취상태로 몰고간다. 특히, 먹스는 힙합 씬에서 베이스 사운드를 가장 기가막히게 활용하는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메인 루프의 뒤를 받치는 것이 아닌, 베이스 자체로 중독적인 메인 루프를 만들어낼 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리드 싱글 "Insane In The Brain"은 먹스 프로덕션의 특징과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곡이다. 조지 셈퍼(George Semper)가 '66년 리 도시(Lee Dorsey)의 곡을 커버한 "Get Out of My Life, Woman"에서 드럼 파트를 샘플링하여 투박하게 꽂아 넣은 다음,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추임새와 극단적으로 부풀린 베이스를 포개어 몽롱한 기운과 펑키한 무드를 조성했다. 더할 나위 없이 신나고 획기적인 비트다.
같은 곡의 드럼을 사용하여 "Insane In The Brain"과 배다른 형제라 할만한 "Hits From The Bong"도 백미다. 먹스는 이 곡에서 "Get Out of My Life, Woman"의 드럼을 영리하게 재활용했다. 다만, 이번엔 원곡자인 리 도시의 것을 샘플링했다. 조지 셈퍼의 버전보다 느릿하게 때리는 드럼 위로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의 “Son of a Preacher Man”에서 따온 나른한 기타 리프를 얹어 듣는 내내 기분 좋은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이 외에도 "I Wanna Get High", "When the Shit Goes Down", "Cock the Hammer", "What Go Around Come Around, Kid" 등등, 신선하고 중독적이며, 샘플링의 미학을 체감할 수 있는 프로덕션의 곡이 빼곡하다. 이중 "Cock the Hammer"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먹스는 이모션스(The Emotions)의 “Blind Alley”에서 상큼하게 뿌려지는 드럼을 가져온 다음, 플로라 퓨림(Flora Purim)의 “Uri (The Wind)”에서 따온 베이스를 합치고 재가공하여 스산한 무드의 비트를 주조했다.
[Black Sunday]는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골수 힙합 팬과 블랙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은 미미했다. 아무래도 당시는 흑인 특유의 그루브한 랩과 프로덕션만이 각광받던 시대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싸이프레스 힐의 음악은 흑인이나 힙합 팬보다 백인과 록 팬들에게 좀 더 인기있었다. 그룹 역시 록 페스티벌에 서고, 록 밴드와의 콜라보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Black Sunday]는 이제 인종과 장르 경계를 넘어 회자하는 힙합 걸작이 됐다. ‘선구적으로 대마초를 주제 삼은 힙합’으로서, ‘성공한 1세대 라티노 힙합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 그리고 ‘획기적인 래핑과 프로덕션을 담은’ 앨범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 본작은 여전히 우릴 미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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