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명령
J Dilla - The Diary
강일권 작성 | 2016-05-05 23:33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6 | 스크랩스크랩 | 22,391 View
Artist: J Dilla
Album: The Diary
Released: 2016-04-15
Rating:Rating: RR+
Reviewer: 강일권
병상에서도 드럼 머신과 샘플러를 놓지 않았던 위대한 프로듀서, 고 제이 딜라(J Dilla)의 사후 앨범이 한동안 계속 나오리라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하루 일과 대부분을 음악 작업으로 보냈던 그가 엄청난 양의 유산(비트)을 남긴 덕이다. 이후 딜라의 미공개 비트들은 사후작 외에도 그가 몸담았던 그룹인 슬럼 빌리지(Slum village)와 동생 일라 제이(Illa J)의 앨범들, 그리고 몇몇 측근 랩퍼들의 결과물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러나 제이 딜라의 이름을 건 앨범은 지난 [Jay Stay Paid](2009) 이후, 무려 7년 간이나 들을 수 없었는데, 그렇기에 [The Diary]는 너무나도 반가운 작품이다.
원래 이 앨범은 2002년, [Pay Jay]란 타이틀을 달고 MCA 레코즈에서 발매될 계획이었다. 딜라의 메인스트림 데뷔작이 될 뻔한 셈이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발표되지 못한 채 묻혀있다가 이번에 나스(Nas)의 매스 어필(Mass Appeal)을 통해 나오게 된 것. 무엇보다 프로덕션 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딜라가 그 어느 때보다 랩에 치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듯 여러모로 흥미로운 배경을 지닌 본작의 출발은 순조롭다. 엘자이(Elzhi), 팻 캣(Phat Kat) 등등, 딜라 곁에서 함께한 언더그라운드 랩퍼들과 간간이 작업해온 프로듀서, 하우스 슈즈(House Shoes)와 딜라가 합작으로 주조한 첫 곡 "The Introduction"의 팽팽한 긴장감이 일품이다. 그러나 반가움이 아쉬움으로 변하는 건 금세다. 인상적인 시작과 달리 전체적으로 범작에 머무른 완성도 탓이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본작이 딜라의 랩 앨범이란 사실이다.
제이 딜라는 비트를 만들 때와 랩을 할 때의 자아가 상당히 다른 편이다. 그가 만든 비트 대부분에선 샘플에 대한 고심과 날카로운 접근이 엿보이지만, 랩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프로듀서로서 알려진 조용하고 섬세한 이미지 뒤에 숨은 거칠고 직관적인 또 하나의 본성을 가감없이 풀어놓는 느낌이다. 이는 본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의 가사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남성성 과시에 기반을 둔 브래거도치오(braggadocio/*필자 주: 자기 과시, 특히, 일종의 ‘허풍’을 가미한 과시)이며, 평소 딜라의 이미지와 언뜻 매치되지 않는 1차원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 주를 이룬다. 문제는 이 같은 딜라의 랩 실력이 프로듀싱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따라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꼭 그가 만든 비트처럼 기술적으로 섬세하거나 파격적일 필욘 없지만, 평범한 가사와 평범보다 좀 더 아래 수준의 플로우라면, 얘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단점을 상쇄해온 건 딜라의 비트였다. 그의 프로덕션은 그동안 작업한 다른 랩퍼들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물론, 다소 모자란 본인의 랩 실력까지 커버하는 마법과도 같았는데, 70% 이상을 외부 프로덕션으로 꾸린 본작에선 이것이 불가능하게 됐다. 딜라의 첫 번째 메인스트림 앨범을 위해 모인 프로덕션 진은 실로 화려하다. 매드립(Madlib), 하이텍(Hi-Tek), 피트 락(Pete Rock), 수파 데이브 웨스트(Supa Dave West), 카림 리긴스(Karriem Riggins), 놋츠(Nottz) 등등…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비트는 대부분 특별히 논할 지점이 없을만큼 허술하거나 평범하고 딜라의 랩과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다. 특히, 하이텍이 만들고 스눕 독(Snoop Dogg)과 코케인(Kokane)까지 조력한 쥐펑크(G-Funk) 트랙 "Gangsta Boogie"는 가장 어색하고 뜬금없이 느껴지는 곡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하우스 슈즈의 "The Introduction"과 함께 빛나는 순간은 존재한다. 놋츠가 팝 락 밴드 실즈 앤 크로프츠(Seals and Crofts)의 "Diamond Girl"을 샘플링하여 디트로이트 풍의 붐뱁으로 재탄생시킨 "The Shining, Pt. 1 (Diamonds)"는 귀에 쏙 들어오는 보컬 후렴구가 가미되어 곡의 매력이 배가됐으며, 피트 락의 무난하게 흘러가는 비트에 빌랄(Bilal)의 보컬이 생명력을 부여한 "The Ex"도 딜라의 랩과 궁합이 괜찮다. 특히, 백미는 딜라 비트의 "Fuck The Police"다. 르네 코스티 앤 히즈 오케스트라(René Costy & His Orchestra)의 "Scrabble"에서 일부 구간을 따와 딜라 특유의 건조하고 단단한 드럼에 버무린 "Fuck The Police"의 역동적인 감흥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아울러 인종 차별에 근거하여 부정과 폭력을 일삼는 (주로 백인) 경찰을 향해 강력하게 일갈한 N.W.A의 "Fuck Tha Police" 정신을 계승한 이 곡에선 오히려 딜라의 원초적인 가사와 랩핑이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이 곡은 이미 지난 2001년에 발표되어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싱글이다. 이를 정식 앨범 수록곡으로 듣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 의미있지만, 보너스 개념과도 같은 "Fuck The Police"를 능가하는 다른 곡들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본작의 맹점을 반증한다.
생전에 딜라가 이 앨범의 발표를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과연 완성도 면에서 어느 정도 만족했을지에 관해선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2002년 당시에 발표됐다 하더라도 탄탄한 정규 디스코그래피에 치명타를 입힐만한 작품이란 사실이다. 새삼 '발생하는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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