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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zel Curry - Melt My Eyez See Your Future
강일권 작성 | 2022-04-13 19:07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8 | 스크랩스크랩 | 6,373 View
Artist: Denzel Curry
Album: Melt My Eyez See Your Future
Released: 2022-03-25
Rating: RRRR
Reviewer: 강일권
덴젤 커리(Denzel Curry)는 오랫동안 우울증 분노조절장애를 앓아왔다. 이 때문에 창작활동까지 위협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여러 장르를 힙합에 버무리는 작업과 심적 상태 이외의 또 다른 주제의 랩을 할 여유가 없었다. 커리의 다섯 번째 정규작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는 다행히 그가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 완성한 앨범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
앨범엔 전통적인 힙합, 트랩 뮤직, 드럼 앤 베이스, 재즈 등등, 커리가 좋아하고 영향받은 다양한 음악이 어우러졌다. 결과물은 장르의 멜팅팟보다 샐러드볼에 가깝다. 핵심은 퓨전으로 귀결되지만, 각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스타워즈], [듄], [황야의 무법자]를 합친 듯한 멋진 뮤직비디오를 배경 삼아 공개된 싱글 "Walkin'"을 보자.
고혹적인 여성 코러스로 시작한 이 곡은 붐뱁(Boom Bap)으로 시작하여 트랩으로 끝난다. 프로듀서 칼 뱅스(Kal Banx)는 작곡가 키스 맨스필드(Keith Mansfield)의 "The Loving Touch"(1973)에서 두 마디의 코러스를 샘플링하여 과거의 힙합과 현재의 힙합이 공존하는 비트를 창조했다. 2022년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올해의 힙합 트랙' 중 하나라며 요란스러운 설레발을 치고 싶을만큼 끝내주는 곡이다.
"Zatoichi"도 좋은 예다. 808드럼을 앞세운 중반부의 비트가 힙합 아티스트의 작품임을 환기하나 어디까지나 드럼 앤 베이스 트랙이다. 곡이 배치된 구간의 흐름도 절묘하다. 바로 앞에는 트랩 프로덕션에 기반을 둔 "Sanjuro"가 있고, 뒤에는 서정적인 재즈 힙합 "The Ills"가 이어진다. 서로 다른 무드와 스타일의 음악임에도 마치 세 번의 변주가 이루어지는 한 곡처럼 다가온다. 각각이 독립적인 동시에 종속적이다. 그리고 이 같은 아이러니는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모든 감흥의 중심에 있는 건 역시 커리의 랩이다. 어떤 스타일의 비트에서든 눈부신 랩으로 휘감아버린다. 옹골지고 타이트하며, 거침없다.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가사의 수준 또한 높다. 거칠고 하드코어한 단어가 펄떡거리는가 하면, 시적인 은유와 비유가 넘실거린다. 그는 두말할 필요 없는 리리시스트(Lyricist)다.
'I see the way the people get treated, it's problematic. They ready to set us up for failure, it's systematic. But when I felt it, my eyes melted. The selfish are constantly profitin' off the hеlpless /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봤어, 문제가 있지. 그들은 우릴 실패하게 하려 해, 체계적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 내 눈은 녹아버렸지. 이기적인 자들은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 있어.’ 같은 라인을 보라. 커리는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에 관해 강렬한 은유로 역설한다.
다만, 매 순간이 빛난 건 아니다. 티페인(T-Pain)이 조력한 "Troubles"부터 "Ain't No Way"와 "X-Wing"까지의 구간은 팽팽하던 긴장감을 순식간에 끌어내리며 감흥을 저해한다. 다소 진부하고 평범한 완성도의 프로덕션과 퍼포먼스가 연속으로 이어진 탓에 다른 곡들과의 괴리가 크다. 장르의 순서만 뒤바뀌었을 뿐, 비슷한 방식의 변주를 취한 두 곡 "Walkin'"과 "Ain't No Way"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극명하다.
다행스럽게도 실망의 시간은 길지 않다. 카리엠 리긴스(Karriem Riggins)의 탁월한 드럼과 프로덕션으로 완성된 "Angelz"가 자칫 림보에 빠질 뻔하던 앨범을 다시금 정상궤도로 올려놓는다.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가 진두지휘한 "Melt Session #1", 사울 윌리엄스(Saul Williams)의 이름이 반가운 "Mental", 대미를 장식한 "The Ills" 등과 더불어 앨범에서 의외로 비중이 큰 재즈 힙합 프로덕션이 돋보이는 곡이다. 특히 이 4곡은 앨범의 기둥처럼 배치되었다.
"Walkin'"의 뮤직비디오에서 황량한 마을과 사막을 횡단하는 연출은 실제 커리가 지나온 괴로움과 아픔의 여정을 빗대어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을 기약할 수 없기에 더욱 무서운 우울장애의 터널,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는 그 속에서 덴젤 커리가 벌인 투쟁의 산물이다. 때때로 아티스트의 고통은 이렇듯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탄생시킨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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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chul
seungchul (2022-04-17 19:41:38 / 121.166.127.***)추천 1 | 비추 0
아 너무좋다.
mrlee
mrlee (2022-04-14 11:50:43 / 116.126.28.***)추천 2 | 비추 0
4.5 아쉽네요... 요즘 나오는 힙합앨범은 선이 얇아서 듣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데 제이펙 마피아 앨범 이후로 간만에 선 굵고 힙합의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앨범이었어요. 메인에 떴을 때 설마 5점인가싶을 정도로 잘들었고 평론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한 번 더 들어봐야겠네요.
보일러
보일러 (2022-04-14 00:11:14 / 58.227.40.**)추천 3 | 비추 0
정말 좋게 들었습니다.
강일권님 말씀대로 아쉬운 곡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다른 곡들은 너무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4.5정도
via http://board.rhythmer.net/src/go.php?n=19852&m=view&s=review&c=17&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