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명령
화지 - EAT
남성훈 작성 | 2014-01-31 19:21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46 | 스크랩스크랩 | 61,263 View
Artist: 화지
Album: EAT
Released: 2014-01-24
Rating: RRRR+
Label: 인플래닛
Reviewer: 남성훈
덥스텝과 멜랑콜리 사운드의 영향권 아래 있는 라우드나인(Loudnine)의 수준급 프로덕션, 그 위에 긴장감을 조성하는 로-파이(Lo-fi) 질감의 톤과 특유의 속도감이 가미된 치밀한 구성의 라이밍을 올렸던 화지의 [화지](2012)는 분명 그해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중 하나였다. 더구나 감각의 과잉에만 힘을 쏟아 오히려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했던, 화지와 영 소울(Young Soul)의 듀오 라디오스타(Radiostarr)의 2009년 작 [Glow In The Dark]가 습작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든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화지의 랩이 안기는 매력이 가장 주효했다. -라디오스타의 물오른 진짜 감각은 3년 뒤 발표한 코믹스(Comics) 컨셉트의 [Villinaire]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내면을 파고들다 세상 밖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작은 서사를 지닌 이야기 구성은 관람자와 청자의 거리가 확실한 선에서 그쳐 여운과 아쉬움 사이에서 마무리되는 약점을 지녔고, 그것이 과연 한계인지 가능성인지 헷갈리는 잘 만든 예고편과 같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면, ‘무료배포’라는 과감한 유통방식의 [EAT]은 과연 화지가 그간 보여준 가능성이 발휘된 앨범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EAT]은 이제껏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역사를 지닌 '한국의 힙합 음악이 쉽사리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이루어 낸 작품'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짜릿한 예술적 성취 그 자체다.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과 한참은 거리가 먼듯한 젊은 언더그라운드 랩퍼가 드러내는 건조하지만 색채 뚜렷한 일상을 담은 [EAT]은 좁게는 역설적으로 동시대 대다수 청춘이 마주한 애달픈 치열함을 떠올리게 하고, 넓게는 사회 구조의 부조리함 속에서 숨겨진 주변인이 되어버린 특정 세대를 그려내는 사회학 보고서로서 기능한다. 이는 힙합이라는 장르 음악이 주는 고유한 즐거움과 장치가 완성도 있게 깔렸다는 게 전제되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EAT]은 바로 여기에 굉장히 충실하다. 전작 [화지]가 신예 프로듀서 라우드나인과 합작을 통해 전체적으로 몽환적 무드를 조성했다면, 이번엔 영 소울이 대부분 트랙의 프로덕션을 꿰찼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 미니멀한 구성의 건조하지만, 강한 울림의 드럼이 만드는 공간 안에 세련되게 변형된 샘플링 소스를 잘라내고 끼워 넣는 감각적인 센스를 발휘한다. 더해서 무료배포라는 형식이 주는 편견을 잊게 하는 누가 들어도 공을 들인 것이 확실한 믹싱과 마스터링 수준은 비트메이커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며 [EAT]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래 젊으니까 머리 빠개지게 사는 거 나 별로니까 나는 오늘 딱 하루 사는 새끼 너도 알겠지 떨어지지 않을 만큼 하는 날갯짓 (중략) 뭐 괜찮아 불만 없는 나의 하루 울적하게 들린다면 가봐 정신과로 난 너랑 달라 걱정 없는 타입이니까 한 잔 쭉 들이켜 약은 약이니까” – 젊은데 中
그런데 진정한 [EAT]의 성취는 단연 화지의 랩에서 시작된다. 랩퍼의 강한 자존감을 과시하는 “집에서 따라하지마”, “새로운 신”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트랙이지만, 이후 “Fetish”를 기점으로 나뉘는 앨범의 큰 두 기류를 자연스럽게 타기 위한 화자를 규정하는 장치로 충실하게 작용한다. 화지는 현재진행형의 젊은 날을 그려내며 동시대 청춘을 다룰 때 으레 등장하는 예상 가능한 대표성을 담지 않는다.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은 한량의 정서, 술과 섹스에 빠져 있는 듯하지만, 일탈이나 안정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결과적으로 위로나 깨달음 같은 전형적인 코드와도 한참은 거리를 둔다. “말어”를 지나 “잘자, 서울”, “젊은데”, “못된 년”까지, 현실을 마주한 젊은 세대가 애써 불안함을 숨기다가 마치 그 불안함을 잊어버리기 위해 살아가는 듯한 청춘의 처연함을 그려내는 전반부의 상승기류는 씁쓸하지만, 동시에 황홀하기까지 하며, [EAT]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라 부를만하다. 랩/힙합 장르에서 어느 정도 전형성을 갖는 ‘마초적 성향’과 이른바 ‘신경 안 써’ 정서를 제대로 구사해내면서 유려한 단어선택과 견고한 랩 설계를 통해 손에 잡힐듯한 묘사로 뚜렷한 공간과 시대성을 획득한 결과다. 이 구간의 곡이 각기 다른 프로듀서의 트랙이란 것도 흥미롭다.
“멋스러운 헛수고, 어쩌고저쩌고 말들이 많아. 업신여기면서도 날 질투하지 동시에 타협 없는 삶 안전빵인 데이잡보단 연거푸 라이밍. 칭얼대는 20대의 얼굴 그 위로 가래침을 뱉고 조롱하는 썰을 매일 풀어왔지 난 저렇게 안 될 거라면서 낭만 없는 인생 수업? 나는 결석” – 스물다섯 中
‘갈수록 계속 비싸지는 자릿값 내 지붕 하나 지키려고 오늘도 무대로 달린다. 아직은 젊다는 위로 딱 4년 남았지 그 짧은 유통기한 뒤로 내가 그리는 거긴 더 멀어질 거란 이론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가끔 의욕을 잃어 10대에 그리던 내 20대 난 지금 살고 있을까?” – 바하마에서 봐 中
내일이 없다는 듯 달려가다 현실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Fetish”를 지나면, 명확한 숫자로 자신의 위치를 직시하는 “스물다섯”에서부터 하강기류가 시작된다. 무드는 곧 차분해지며 진해진다. 사실 그가 택한 것은 전반부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흥은 푹 꺼져 있다. 사회가 부추기기까지 하는 청춘의 객기와 일탈이 어떤 이의 생활방식이 되는 순간 차가워지는 시선을 견뎌내는 방법은 현실이 아닌 낭만에서 찾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현실을 화지는 비루한 듯 담담하게 그려낸다. 꿈꾸는 자들과 편히 쉬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테크니컬러”와 “한 그루만 태울게”를 지나 결국, 그가 찾아가는 곳은 소박하지만, 유일한 낭만의 공간이었던 여자친구의 작은 차 안이고, 인생을 걸고 찾아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막연한 가상의 낙원 ‘바하마’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은 ‘스펙’을 쌓고 ‘멘토’를 따라 ‘소통’, ‘힐링’하며 사회의 문턱을 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목적지는 과연 행복한 곳인지, 또는 존재는 하는 것인지에 관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화지는 (故)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절룩거리네”에서 호소했었던, 또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졸업”의 도입부에서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면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라는 가사를 통해 전달한 강력한 울림과 유사한 감상을 힙합앨범 [EAT]을 통해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아티스트가 담아낸 이야기가 중요한 지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완성도 있게 음악으로 담아냈느냐에 따라 그 진정한 가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EAT]은 건조한 듯 세밀한 묘사력과 이야기에 긴장감을 주는 플로우 디자인으로 고유함을 획득한 화지의 랩과 견고하고 감각적인 프로덕션이 만난, 근 몇 년 사이 가장 치켜세울만한 한국 힙합 앨범이다. 나아가 아티스트가 개별 곡에서 장르적 쾌감을 주는 사이, 앨범 전체로는 특정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 채 마주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발견할 수 있게 감상의 여백을 넌지시 던져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하게 얻어걸리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항상 회자하는 훌륭한 힙합 클래식이 이룩한 성취의 개념이기도 하다. [EAT]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보편성을 추구하거나 애써 시선을 외부로 향하고 있지 않지만, 치밀한 짜임새의 예술성 덕에 듣는 이로 하여금 완전히 별개의 감상 확장을 유도하며, 묵직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제껏 유사한 메시지를 다루던 한국 힙합 앨범과 차이이며, 강점이다. 뛰어난 작품이 다양한 해석을 허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바라보고 의미를 끄집어내더라도 민망하지 않은 견고함 덕분이다. [EAT]은 기술적 완성도, 장르적 장치, 혹은 (랩퍼의) 캐릭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이제껏 한국 힙합 앨범이 올라가지 못했던 곳에서 이룬 색다른 성취를 접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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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
권오현 (2014-02-18 23:45:58 / 39.115.121.***)추천 5 | 비추 3
앨범은 정말 좋았지만 랩은 전체적으로 톤이 좀 불안한 느낌이...
무료 배포니 뭐니 다 떠나서도 아주 오랜만에 굉장한 퀄리티의 앨범이었어요~! kambino kambino (2014-02-10 22:11:51 / 175.211.196.***)추천 2 | 비추 21 무엇보다 다른건 둘째치고 랩을 드럽게못하던데..귀로 읽어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들으시면 편할듯 Junenee Junenee (2014-02-04 12:24:47 / 39.7.56.**)추천 6 | 비추 1 이런 묵직한 바이브는 국힙에서 되게 드문편 아닌가요? 정말 괜찮았습니다! 윤정준 윤정준 (2014-02-04 10:14:28 / 61.102.87.***)추천 14 | 비추 1 최근 아니, 근 몇년간 발매된 국내힙합 앨범중에 이만큼 힙합스럽고 묵직하고 분위기 있는 앨범이 있었나요? 대단하고 대단하네요 멋집니다! 앞으로도 기대합니다! sodgh sodgh (2014-02-01 05:14:37 / 110.9.1.**)추천 11 | 비추 1 상당한 짜임새, 그리고 Dope이란 표현에 가장 걸맞는 앨범이었죠. 각 트랙의 유기성을 리뷰에서 잘 짚어주셨네요. 가벼운 유통방식과 정반대로 상당히 묵직한 앨범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라우드라인의 프로듀싱을 크게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영소울의 프로듀싱으로 사운드가 채워졌더군요. 근데 라우드라인 못지 않게 사운드 운용 능력이 출중해서 놀랬습니다. 그러고보니 영소울의 무료 EP인가는 대체 언제... 김도현 김도현 (2014-01-31 23:52:54 / 180.66.18.***)추천 10 | 비추 20 매력적인 요소가 많은 앨범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랩 구조가 탄탄하고 표현력도 군더더기 없더군요. 깔끔한 사운드, 랩의 텐션, 전체적인 무드의 일관성도 꽤 멋스러웠습니다.
허나 힙합 안에서 전형적이라는 이유로 앨범에서 명확하게 자리한 '마초이즘'까지 멋스럽다고 받아들이기는 좀 애매하네요. 좋지 않은 의미로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특정 성향을 '방황하는 청춘'으로 두둔하도록 만드는 게 힙합이라는 장르로써의 성취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뭐, 힙합 판타지를 다룬 피처에 비키니녀들과의 끈적한 칠링을 실었던 리드머이기도 하니 그런 부분을 '멋진 힙합스러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이해 자체는 됩니다.)
그리고 차붐의 헐거운 라이밍의 랩은 그 자체만으로 거슬리는 사운드였습니다. 특유의 목소리, 마초적이고 길거리를 언급하는 가사 등을 이유로 차붐의 랩 자체를 옹호하는 몇몇 팬들과 비평가들은 좀 안타깝네요.
아무튼 사운드적으로 꽤 세련된 무드를 형성하는 앨범이었고 멋진 훅과 랩이 담긴 매력적인 몇몇 트랙들은 자주 듣고 있습니다.
평점은 너무 후하네요. 저는 별 세 개 정도. ^^ Fukka Fukka (2014-01-31 22:27:26 / 118.33.62.***)추천 16 | 비추 8 외국앨범이나 국내앨범도 예전에 4.5받으면 호평 일색인데 aquino님은 뭔 되도않는 음모론 ㅋㅋ
이앨범 충분히 4.5받기에 충분함. 개인적으론 4.3정도지만 0r트모스 0r트모스 (2014-01-31 21:32:01 / 1.241.26.**)추천 17 | 비추 2 전 별5개만점중에 4개정도 주고 싶네요. 정말 좋은 앨범이라 생각하는게 화지라는 랩퍼가 꾸밈없이 자신의 얘기와 고충과 토로를 곳곳에 쏟아낸 앨범이라 만족합니다.
근데 랩은 솔직히 듣다보면 좀 지루한 감이 있을 정도로 뒤로 갈수록 좀 밋밋한 감이 있습니다. 바비 제임스 밤의 영어부분만큼 중간중간 트랙마다 그렇게 터뜨려 주었으면 어땠을가 생각이 들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커버하는 것이 가사적인 측면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Aquino Aquino (2014-01-31 21:22:57 / 129.70.6.***)추천 22 | 비추 21 정말 좋은 앨범이긴 하지만.... 인플래닛 소속 가수라는 점에다가 비평에 단 한 줄의 앨범에 대한 아쉬움도 없는 걸로 보아서 뭔가 평가의 신뢰 조금 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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