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명령
쿤디판다 - 가로사옥
남성훈 작성 | 2020-08-07 01:26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46 | 스크랩스크랩 | 43,995 View
Artist: 쿤디판다
Album: 가로사옥
Released: 2020-07-26
Rating: RRRR
Reviewer: 남성훈
쿤디판다(Khundi Panda)는 2015년 첫 믹스테입(Mixtape) 이후 양질의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2017년엔 프로듀서 비앙(Viann)과의 합작 [재건축]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으로 선정되는 등, 앨범을 통하여 힙합 씬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주목받았다. 그런 그가 2019년 레이블 데자부 그룹(Dejavu Group) 합류를 알리는 싱글 "AMA"외에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드디어 첫 솔로 정규작 [가로사옥]으로 돌아왔다.
쿤디판다의 음악을 찾아 듣는 이라면 [쾌락설계도], [재건축]과 삼부작을 이루는 듯한 타이틀을 보자 마자 상당한 호기심과 기대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쿤디판다 특유의 가사와 퍼포먼스를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건축]에서 그는 개인의 서사를 깔고, 그 위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한국힙합 씬을 파고들어 결국, 한국사회의 이면까지 소환하게 하는 인상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가로사옥]의 기본적인 무드는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정 시기에 그에게 찾아온 심상을 풀어내는 주제의식도 색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쿤디판다는 전작과 [가로사옥]을 차별화하는데 성공했다. 차별점이 즉각적으로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꽤 선명하게 잡힌다. [가로사옥]의 이야기 범위는 이전보다 좁아졌고 대상은 더 구체적이며, 서사는 구조적으로 짜였다. 스타일의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작정한 듯 스스로를 몰아붙인 것이다.
앨범 자체를 예고하는 듯한 "블랙박스"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이른 하이라이트 "네버코마니"의 지독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드는 대표적이다. 전에 없는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전개가 귀를 잡아 끄는 사이에 쿤디판다는 4분이 채 안되는 시간에 래퍼 김심야를 향한 듯한 애증을 무기로 한국힙합을 끄집어낸다. ‘활동구역’인 인터넷 게시판들과 오디션쇼 [쇼미더머니]까지 래퍼로 자리잡기 위해 거쳐가는 기형적이지만, 정석적이기도 한 코스에 그저 충실했던 자신을 투영해서, 모든 시선을 거둬낸 한국힙합의 현실을 그 자체로 다가오게 만든다. 더해서 한국대중음악상 일화로 “네바코마니”를 근래 찾아보기 힘들었던 짜릿한 자수성가 힙합 트랙으로 마감하기까지 한다.
이어지는 곡에서도 이러한 패턴은 반복된다. 쿤디판다가 힙합 아티스트로서 겪은 다층적인 기억과 감정은 트랙 별로 완전히 분리되어 담겼고, 이를 하나씩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은 앨범의 핵심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풀어내 곱씹는 감정과 극복의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보편적이면서 예상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점 때문에 [가로사옥]은 오로지 랩 음악이 지닌 매력을 강력하게 발산한다.
충분한 디테일로 스스로를 맹렬하게 파고들며 끝장을 보는 듯한 쿤디판다의 랩은 그가 짠 구조적 틀을 효과적으로 빡빡하게 채워낸다.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며 많은 양의 정보를 상세하게 풀어놓는 랩 스타일은 언뜻 강박적 형식미에 매달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텍스트로 각인되는 것과는 거리를 둔 치밀한 라이밍 배치와 이를 통한 플로우 설계 덕분에 자연스레 다가온다.
또한, 반골 기질이 깔린 감정선을 과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보여주는 연기력도 이를 뒷받침한다. 가사 속에 숨은 디테일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가는 그의 행보를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에 달렸다. 그것이 [가로사옥]의 큰 재미이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가로사옥]은 한국힙합 속 최상급 랩 퍼포먼스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앨범이다.
비앙(Viann)이 여전히 가장 많은 트랙에 이름을 올렸지만, 다수의 실력파 프로듀서가 참여한 프로덕션도 쿤디판다의 랩을 지원하는데 손색없다. 히피는 집시였다 제이플로우(J-Flow) 특유의 몽환적 기운 가득한 마지막 곡 "집"의 무드가 너무 급작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마감된 사운드 소스와 악기가 잘 맞아 떨어지는 세련된 질감의 비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쿤디판다의 내달리는 듯한 랩과 엇갈리는 듯 합을 맞춰가는 속도감과 많은 랩의 정보량으로 쌓이는 피로감을 환기하는 약간의 변주는 [가로사옥] 프로덕션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그중 짙게 퍼지는 베이스 주도의 펑키한 그루브가 넘실대지만, 랩의 전개와 한치의 어긋남 없이 흘러가는 “양심트리거”는 매우 놀랍다. 트랙 대부분의 종반부에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연출한 것도 앨범의 구조적 틀을 견고히 하는 흥미로운 장치로 자연스레 녹아 들었다.
쿤디판다가 그려낸 시기의 한국힙합을 살폈던 이가 아니라면, [가로사옥]은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과잉의 랩으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흡수할 것을 요하는 앨범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제나 구성을 유치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가로사옥]은 그저 한국힙합 최전선의 랩이 담긴 힙합 앨범을 듣는다는 즐거움 하나만으로도 반드시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탄탄한 음악적 완성미에 실력이 담보된 고유한 스타일을 겸비한 장르 앨범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 자체를 즐기다 보면, 쿤디판다가 치열한 방식으로 의도한 장르 음악적 감흥을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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