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명령
최엘비 - 오리엔테이션 황두하 작성 | 2019-02-16 02:48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17 | 스크랩스크랩 | 30,693 View Artist: 최엘비(CHOILB) Album: 오리엔테이션 Released: 2019-01-25 Rating: RRRR Reviewer: 황두하
크루 섹시 스트리트(Sexy Street)와 우주비행(wybh) 소속의 신예 최엘비(Choi LB)는 그간 동료들보다 주목받지 못했다. 초기 빈지노(Beenzino)를 직접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플로우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핵심을 짚지 못하는 가사 탓이 컸다. 2017년에 발표한 첫 EP [푸른바다 37]은 이러한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발성과 톤이 잡히지 않아 비트에 묻어나지 못하고 붕 뜬 랩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약 1년 반 만에 발표한 첫 정규앨범 [오리엔테이션]은 이러한 인식에 변화를 줄 만하다. 가장 인상적인 건 눈에 띄게 발전한 랩 퍼포먼스다. 시원시원한 발성과 유려해진 플로우로 앨범 내내 귀에 쏙쏙 박혀 들어온다. 상승하는 신시사이저와 맞물려 내지르는 후렴구로 앨범의 포문을 힘차게 여는 첫 트랙 “신입생환영회!”는 대표적. 다소 성긴 라임을 보탠 게스트 기리보이(Giriboy)나 비와이(BewhY)를 압도하는 퍼포먼스로 주인공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앨범의 주제 또한 흥미롭다.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제목처럼 최엘비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자 사회초년생으로서 겪는 감정을 풋풋함과 진지함이 적절히 섞인 가사로 풀어낸다. 특히, 특정한 사건들을 상당히 구체적인 어휘로 묘사한 덕분에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신입생환영회!”, “편의점KID”, “개미”, “사랑+실수=증오” 등은 이러한 묘사가 빛을 발한 트랙들이다. 한영혼용의 남발 없이 이뤄낸 성취란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시점을 현재로 옮겨와 앞으로의 다짐을 담아낸 후반부 트랙들 역시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는 전반부에서 20대 청춘의 순수함을 잘 묘사한 덕분이다. 스웩의 전형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치있게 비튼 “드림카”와 과거를 반추하며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이륙(26)” 등등, 순수함이 강한 열정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처럼 내러티브를 마지막 트랙까지 잘 이끌고 간 덕분에 끝까지 집중력이 흐려지지 않는다.
댄시즈(dnss), 코스믹 보이(Cosmic Boy), 선데이 캔디(Sunday Candy), 코아 화이트(Coa White) 등이 참여한 프로덕션 역시 탄탄하다. 전체적으로 분위기의 고저가 확실하게 느껴져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질감의 신스 운용으로 사운드의 일관성이 느껴진다. 젊은 꼰대(?)의 일면을 사실적으로 담아 실소를 자아내는 “302호강의실”이나 아카펠라 랩이 인상적인 “운전면허Skit”처럼 분위기를 환기하는 스킷들도 흥미롭다. 10트랙이라는 짧은 곡 수 안에서 앨범을 알차게 구성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최엘비는 존재감을 선명히 아로새기는 데에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적 성취에서도 크루의 다른 동료들보다 한발 앞서가게 되었다. 이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완성형에 가까워진 랩과 뚜렷한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개성 있는 가사, 그리고 영리하게 앨범을 구성한 기획력까지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동료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의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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