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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국내리뷰 사색 - Not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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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6일 (일) 17:37 판 (새 문서: 사색 - Not Bad 강일권 작성 | 2022-06-11 02:42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11 | 스크랩스크랩 | 6,453 View Artist: 사색(Sasaeg) Album: Not Bad Released: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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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Not Bad 강일권 작성 | 2022-06-11 02:42 업데이트 | 추천추천하기 11 | 스크랩스크랩 | 6,453 View Artist: 사색(Sasaeg) Album: Not Bad Released: 2022-06-08 Rating: Reviewer: 강일권





힙합은 아티스트의 배설적 행위가 제일 극에 달한 음악이다. 대개의 경우, 창작자 본인이 서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리스너가 귀를 기울이든 말든 상관없이 래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성과 감정을 배설한다. 그것이 그냥 흘려보내야 할 배설물이 되느냐 지긋이 대해야 할 감상의 대상이 되느냐는 결과물의 매력도에 달렸다. 끌어당기는 힘만 있다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혹은 내가 알 수 없고 알고 싶어 할 까닭이 없는 일을 담았더라도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 앨범이 그렇다. 사색(Sasaeg)이란 래퍼의 개인사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Not Bad]를 듣는 동안만큼은 어느새 감정적 유대가 생긴다. 앨범엔 갑갑한 기운이 그득하다. 마치 오래 전 공단에 들어섰을 때 몸과 마음을 짓누르던 매캐한 공기 같다.


그가 비탄과 자기연민 속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궁극적인 이유와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증오가 향하는 주된 대상(아빠)을 뚜렷하게 알 수 있지만, 가슴 한편을 침울한 적요로 내리누르는 건 구체적인 흔적보다 작품 전반을 감싼 기운이다.


이는 프로덕션, 래핑, 가사가 서로의 억제기처럼 작용하여 형성됐다. 각 요소가 얽히면서 중화되어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뾰족하게 끝을 세운 래핑은 금방이라도 살을 파고들 것처럼 꽂혀온다. 그런데 한껏 냉랭한 어휘로 감쌌으나 여린 내면이 너무나도 절절히 전해지는 가사가 날을 살짝 무뎌지게 한다.


날카로움이 과잉되어 끝내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을 퍼포먼스의 아킬레스건을 가사가 보호한 셈이다. 반대로 준수한 스토리텔링과 표현을 갖췄지만, 너무 일관적이고 일방적인 주제의식이 몰입을 해할 가능성이 있는 가사에서의 함정을 타이트한 래핑이 잘 메워준다. 잊지 마시라. 아무리 주제와 가사적 장치가 훌륭하다 한들 랩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무색하다는 것을. 사색의 랩은 탄탄하다.


그런가 하면, 얼터너티브 힙합의 영향이 느껴지는 프로덕션은 사색의 감정에 너무 동화되어 휩쓸리기 직전 한발 물러나 음악 자체의 완성도를 곱씹어 보게끔 한다. 래핑과는 또 다른 냉기를 품었다. 강력한 한 방은 없으나 루프의 매력보다 소리의 조합이 주는 감흥의 핵심을 잘 잡아낸 비트가 앨범의 오묘한 무드에 방점을 찍는다. 특히 프로덕션과 서사가 매우 끈끈하게 맞물려 있다.


“조수석”에서 “우에서 조”로 이어지는 구간이 좋은 예다. 사운드 소스 활용이 극도로 배제되고 최소한의 리듬 파트를 위한 드럼만, 그것도 드문드문 배치된 가운데, 휴대폰 버튼 조작음으로 연출된 불길한 소리가 주도하는 “조수석”은 아빠의 직설적 발언을 그대로 옮겨온 가사로 앨범에서 가장 불안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아티스트의 괴로움이 투영된 음악을 듣는다기보다 아티스트가 괴로움에 잠식되기 직전까지 몰린 상황을 강제로 목도하는 듯하다. 휴대폰 조작음도 어느샌가 응급상황이 닥친 심전도 기계 소리처럼 변하여 파국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부자관계가 주는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음악을 들으며 이토록 좌불안석한 적이 있나 싶다.


그러나 바로 다음 곡 “우에서 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분위기의 비트다. 경쾌하고 펑키하다. 후렴구는 심지어 1990년대 초·중반 국내 랩 댄스 음악에서 듣던 것과 흡사하다. 여느 앨범이었다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줄기를 가진 [Not Bad] 속에서 이 같은 구성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색의 그때그때 심경을 대변하며 절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두 곡 사이에는 억지로라도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뱉어대는 기합소리(?)의 스킷 “시간은 지나고”가 존재한다. 그 흐름을 이어받는 “우에서 조”의 프로덕션은 앨범의 무드로부터 가장 동떨어졌지만, 이처럼 가사와 합체되어 흐름상 자연스러우며 꼭 필요한 템포의 곡이 됐다(‘이게 조증인가 정상인가 사실 약간 애매하지만 뭐 어때 지금 내가 기분이 좋은데 뭐’).


이 고통스럽고도 매력적인 작품의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다면, 부족한 라이밍이다. 우선 강조하건대 이전의 말도 안 되는 라임 유무 논쟁을 일으킨 몇몇 래퍼들과는 전혀 다른 경우다. 그동안의 결과물을 통해 드러난 사색의 스탠스는 ‘메시지를 위한 라임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부류가 아니다.


[Not Bad]에서도 그는 확실하게 라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제대로 구사할 줄 안다. 그럼에도 꽤 많은 곡의 라인에서 종종 라임이 실종되거나 다소 어색한 배치 탓에 완연히 살아나질 못한다. 부족함이 없는 플로우와는 상반된 부분이다.


래퍼들이 매 라인에서 라임을 구사하는 이유가 단지 힙합의 탄생 때부터 정해진 규칙이기 때문은 아니다. 라임과 라임 사이에 메시지를 넣고 그 맛을 살리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기에 래퍼의 역량이 드러나는 지점이자 랩에서의 그루브와 말맛을 극대화하는 요소인 까닭이다.


만약 라임 구조가 탄탄했다면, 앨범의 감흥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색이란 아티스트와 [Not Bad]가 충분히 조명 받을만하다는 소리다. 2019년부터 무려 14장의 EP(한 장은 합작)를 발표한 끝에 드디어 그의 이름을 아로새길만한 작품이 나왔다. EP를 거듭하며 발전한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앞으로 더 놀라운 앨범이 나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가 된 아빠를 향한 처절한 고백인 동시에 그런 아빠로부터의 분리, 혹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담긴 일기. [Not Bad]는 어쩌면 그가 우울함과 압박감을 배설함으로써 치유하는 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나쁘진 않다’라는 제목은 이미 나쁠 만큼 나쁜 현재의 역설처럼 다가오지만, 아티스트 사색의 커리어는 분명히 더 나아지고 있다.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 글: 강일권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20 코멘트 등록 2tu 2tu (2022-06-11 21:32:08 / 124.111.142.***)추천 4 | 비추 0 이렇게 감정이 담겼는데 오글거리지 않게 뱉을 수 있는 랩능력이 대단하네요. 좋은 아티스트 알아갑니다.


via http://board.rhythmer.net/src/go.php?n=19909&m=view&s=review&c=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