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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엘이인터뷰 J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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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0월 15일 (금) 02:43 판 (새 문서: [Music Salon] JJK 게임 <삼국지>를 해본 사람이라면 변방의 흉노, 오환, 산월족이라는 강력한 민족을 알 것이다. 그들은 게임상에서 성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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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alon] JJK


게임 <삼국지>를 해본 사람이라면 변방의 흉노, 오환, 산월족이라는 강력한 민족을 알 것이다. 그들은 게임상에서 성은 하나 뿐이지만, 플레이어나 컴퓨터 입장에서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민족이 아니다. 자칫 덤벼들었다가는 그들의 강한 전투력에 박살이 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ADV의 리더인 래퍼 JJK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에서 오랜 기간 자기 자신을 견고하고, 또 외롭게 지켜왔다는 점에서 <삼국지>의 변방의 민족과 매우 닮아 있는 듯하다. 신의 외곽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JJK의 스타일과 영역을 쉽게 넘볼 수 없었고, "비공식적 기록 Ⅱ"에서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힙합엘이는 그런 그를 만나 그가 기억하고, 지니고 있던 '비공식적'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듣고 왔다. 우린 인제야 이렇게나마 그 이야기들을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됐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 인터뷰 하나로 한국힙합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읽게 될 것이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한국힙합, 그리고 JJK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 본 인터뷰는 5시간 분량의 인터뷰로 양이 어느 인터뷰보다도 많은 관계로 편의상 인터뷰이의 커리어 순대로 챕터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더불어 인터뷰에 관련된 사진과 이미지, 영상을 찾는 데에 도움 주신 ADV의 스태프인 이다혜 님과 김화영 님, 사진 사용을 허락해주신 포토그래퍼 우리 님, 녹취 작업에 도움주신 힙합엘이의 스태프인 Jenny 님과 GDB/ANBD 님에게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 근황 -


LE: 반갑습니다. 먼저 힙합엘이 회원분들께 인사, 그리고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릴게요.


J: 안녕하세요, 저는 JJK라고 하고요. ADV의 리더이며, 힙합신의 몇 안 되는 유부남이며… (웃음) 그렇습니다. JJK입니다.






LE: 이제 곧 2세를 맞이하시는 점 축하 드려요. 소감(?) 부탁 드려요.


이것만 해도 뭐… 쭉 나올 것 같은데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아예 다 달라지는 경험이에요. 너무 기쁘고, 기대하고 있고, 몸속에서 생명을 만들고 있는 부인이 참 미안하면서도 너무 고맙고 대견해요.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요.






LE: 태명이나 미리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으신가요?


태명이 아니라 이미 이름을 정했고요. 고결이라고 정했어요. 성이 고씨고, 이름이 결이에요.






LE: 출산 예정일은 언제쯤인가요?


8월 20일이 예정일이에요.






LE: 아직 조금 남으셨군요.


네. 조금 남았죠.






LE: 요새는 근황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음악적인 근황도 좋고, 생활적인 근황도 좋습니다.


계속 작업하고 있어요. 랩도 하고, 공연 잡힐 때는 공연하고, 다음 작품 준비하고 있고… 아무래도 이제 (유부남이다 보니까) 부인의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는 삶이 됐기 때문에 다들 밖에서 술 마시러 놀러 나가거나 작업할 시간에 저는 자요. 아주 규칙적으로 밤 12시에는 딱 자고, 아침 8시에서 8시 30분 사이에 딱 일어나서 (부인과) 같이 출근하고, 그러다 집으로 딱 돌아와서 작업해요. 그렇게 지내다가 레슨 시간이 되면 레슨 딱 하고, 끝나고 돌아오면 식사하고 자고요. (웃음)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LE: 사실 음악인과 음악인이 아닌 분이 결혼하게 되면 음악인의 삶은 밤낮도 없고 해서 애로사항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패턴을 바꿔야 하니까요. 처음에 적응하실 때 좀 힘드셨을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저희가 결혼을 하기 전부터 같이 지냈어요. ‘우리 어차피 결혼할 거니까 일찍부터 같이 지내자.’라고 하면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같이 살게 됐어요. 그렇게 같이 지내면서 일찍 이부터 천천히 익숙하게 만들어왔어요. 작업 시간을 조율해서 출근 시간에는 맞이해준다든가 하면서 서로의 타이밍을 맞춰나갈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이걸 막 맞춰야 해서 힘들었다거나 한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거 같아요.






LE: 가장 최근에 ADV에서 있었던 자체적으로 가는 MT인 'ADVMT'는 어땠었나요?


제가 처음 MT를 가자고 했을 때부터 일부러 겨울에 가자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여름에 가면 바깥에 나가서 놀고 싶어지고, 애들이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라 여름에 가면 보나 마나 해수욕장 가자고 할 거고, 가면 또 비키니 입은 여자들 보고 싶고… 그럼 또 막… (웃음) 바깥으로 새는 경우가 생길 것 같더라고요. 저는 MT를 가서 서로 진지한 얘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바깥에 나가면 추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겨울로 잡았죠. (웃음) 이번에도 저희가 자주 가는 펜션에 가서 앉아서 술 마시고, 서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지난 한 해를 기념하고, 또 올 한 해 동안 뭘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도 하고, 개별적인 속사정이랄까요? 그런 것도 얘기하고요. 멤버들의 계획들은 저희가 주말마다 회의를 하기 때문에 늘 들어요. 그래서 계획들보다는 각자의 섭섭함과 서운함 같은 그런 속마음들? 그런 걸 많이 털어놓고, 또 미뤄놨던 혼냄들? (웃음) 그날 몰아서 조지고… 그러면서 보냈어요.






LE: ADV 멤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하겠지만, 페이스북을 보니까 이번 MT에서는 J7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활동했던 멤버인 오진석 씨가 음악 쪽에서 연기 쪽으로 방향을 다시 고쳐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 자체가 MT때 딱 처음 나온 건 아니고요. 전부터 이야기가 있었는데, MT때 그걸 또 다시 이야기하면서 서로 확실히 한 거죠. ADV는 어쨌든 힙합을 기반으로 만나게 된 크루고, 그건 전혀 흔들림이 없는 사실이에요. 근데 진석이 같은 경우에는 나이가 워낙 어리고, 진석이가 힙합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도 1년도 채 안 돼서 처음에 혼동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아마 지금 랩을 시작하는 대부분 아이들도 이런 마음일 거로 생각해요. 이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너무 멋있고, 너무 하고 싶고, ADV를 가까이서 보니까 그런 힙합의 원초적인 움직임을 중요시하는 그런 것도 너무 좋고, 사람들이랑도 너무 잘 맞고 이러다 보니까 함께 해서 이 문화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동경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순간 착각을 한 거죠. 나쁘게 말하면 착각인데, 그러면서 ‘아, 나도 랩을 하고 싶다.’, ‘나도 힙합을 대표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직접 ADV가 돼서 ‘그래서 힙합이 무엇이냐?’, ‘그래서 한국힙합이 어떤 상황이냐?’,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와 같은 힙합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겪어보면서 본인이 생각했대요. 이걸 정말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동경했던 거고, 동경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섣불리 뭔가 하나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던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고요. 본인이 직접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근데 요즘에 랩을 시작하는 친구 중 대부분이 힙합이 무엇이라고 느끼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로 생각해요. 대부분 그냥 멋있어서 하는 거죠. 근데 멋있어서 시작해서 약간 기믹처럼 따라 하기도 하고, 그 간지를 뽐내는 시간을 거치면서 ‘아, 힙합이 이런 거구나.’라고 느끼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끝까지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멋있다고만 생각하면서 하는 경우도 있죠. 되게 다양한 케이스들이 있겠지만, ADV라는 단체의 속성 자체가 길에서 프리스타일하는 등의 힙합이 처음 탄생했을 때의 모습 있죠. DJ가 길에서 전기 어디서 가져와서 턴테이블을 돌리고,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소박하게 모이고, 그러면서 싸이퍼를 하잖아요. 또, 믹스테입이 나오면 그 싸이퍼하러 나온 길에서 직접 팔고 그러잖아요. 저희가 그런 걸 많이 동경하는 집단이에요. 그리고 그런 흐름이 한국힙합에 꼭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갖고 있는 편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가사적 성향이나 음악 듣는 성향도 그냥 막 차, 여자 이런 게임이 있는 속성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맛을 중요시해요. 다른 것보다 ‘그래서 이게 내 이야기인가?’ 이런 걸 더 중요시해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래서 진석이 같은 경우는 ADV 안에 있다 보니까 (동경하는 거였다는 느낌이) 좀 더 빨리 온 것 같아요. ‘아, 이게 힙합의 멋이구나. 그렇게 따지면 나는 마냥 동경해서 한 거구나.’라고 느낀 거죠. (ADV와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 그리고 힙합의 멋과 힙합의 멋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냉철하고 일찍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환영하는 바에요. 어찌 됐든 힙합이란 건 애티튜드고,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힙합이라고 해서 다 마이크 잡아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진석이가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계속 ADV랑 같이 다니면서 이 문화 속에서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점점 갈수록 진짜 힙합을 경험하면서 더 힙합다운 면도 가지게 될 거 같고… 연기자로서 힙합다움을 못 끄집어낼 거라고 생각도 안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진석이가 냉철하고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판단한 것에 있어서 오히려 고마울 정도죠. 지난 한 달 동안 너무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내부적으로도 엄청 까였어요. ‘아, 시발 그래서 너 뭐하겠다는 거야?’, ‘넌 Fake이야.’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웃음) 근데 이게 맞는 것 같아요.






LE: ADV 얘기는 뒤에서 또 하겠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어린 친구들이 있어서 JJK 씨가 그야말로 두 집안의 가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본인도 그런 걸 많이 느끼실 거 같아요.


그렇죠. 진짜 딱 맞는 말이에요. 약간 친척 동생들, 혹은 진짜 아들 이런 간지로 보는 애들이 많아요. 근데 뭐, 그에 반해서 조이레인(Joyrain) 형 같은 저보다 진짜 형도 있고, 갱자(gJ)처럼 저보다 한 살 어린 친구도 있으니 모든 멤버가 마냥 다 어린 건 아니지만, 주축을 이루는 MC들이 대체로 어린 편이죠. 또, 완전 어릴 때부터 봐왔던 애들도 있고 해서 그런 감이 없잖아 있죠. 랩만 챙기는 게 아니라 진짜 부모처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챙기게 되더라고요.






LE: 힙합플레이야(Hiphopplaya) 인터뷰에서 제 이름(블럭)을 얘기해주셨는데, 사실 저는 내부적으로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웃음) 혹시 이와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사실 진짜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진짜 블럭 씨가 그렇게 멘션을 보내서 이루어진 인터뷰인 줄 알고 ‘와, 이게 진짜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신기했어요. 되게 감사했고요. 그렇다고 지금 안 감사한 건 아니고요. (전원 웃음) 재미있는 일이다 싶어서 ‘인터뷰 가서 꼭 샤라웃 쳐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갔었어요. 근데 가서 분위기를 보니까 ‘어? 그랬어?’ 약간 이런 분위기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샤라웃은 쳐야지.’ 하고 언급했었죠. (웃음)






- 데뷔 전 -


LE: 일단 근황은 이렇게 짧게 하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웃음) 우선 가장 기본적인 건데, JJK라는 이름이 가진 뜻은 무엇인가요?


JJK는 저의 영문 이름의 이니셜이에요. 제가 영어 이름이 조나단인데, 그래서 조나단(J) 정현(J) 고(K)라고 해서 JJK인 거예요. 조나단이라는 이름이 되게 범생이 같아서 오랫동안 인터뷰에서 말을 안 했는데, 그냥 저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웃음) 아직도 그걸 뭐라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접착식으로 붙일 수 있는 빨간색 그거 있잖아요. 스테이플러랑 비슷한 거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가 그걸로 책상에다가 JJK라고 붙여주시면서 너 이름이 조나단 정현 고니까 이니셜로 이렇게 쓴다고 알려주셔서 그 뒤로 제가 뭔가를 했을 때 늘 JJK라는 이름을 썼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랩을 하면서도 이어져서 JJK라고 한 거예요.






LE: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DoubleJ K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아, 그게 제가 제 이름을 외칠 때 DoubleJ K라고도 했었어요. JJK가 뭔가 음절수도 너무 적고, J가 두 개가 겹쳐 있으니까 외칠 때나 랩을 할 때 안 어울리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A.K.A처럼 편하게 DoubleJ K라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해서 그렇게 불러주시는 분들도 초창기 때는 있었죠.






LE: 그렇다면 JJK를 대표하는 문구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자주 안 쓰시지만 ‘Makes The Way’라는 말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좀 전에 DoubleJ K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 ‘이름이랑 라임이 맞는 문구가 뭐가 있을까?’ 생각했었어요. 랩을 부르지도 않고 랩을 쓰기만 해서 게시판에 올리고 그럴 때였는데, 당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뒤에 오는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 어린 마음이 얽혀서 ‘Makes The Way’라는 문구를 쓰게 된 거죠. 그때 되게 유치하지만 ‘DoubleJ K, Makes The Way, To The Next Day’ 이런 식으로 내일로 길을 개척해나가자는 의미의 말이 한 세트로 있었어요. 지금은 존나 오글거리는데… (전원 웃음) 10대 중반 때 게시판에 썼던 가사의 한 라인이에요. 거기서 맨 뒤에 거는 진짜 너무 유치하니까 ‘Makes The Way’만 남겨서 상징적인 라인으로 쓰고는 했죠. 지금도 가끔 써요.






LE: 외국에 살다 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어디 계셨었는지 궁금해요. 또, JJK라는 이름은 그때 짓게 된 건지도 궁금해요.


처음에는 테네시라는 촌동네에 있었고, 그 후에는 시카고 바로 옆에 있는 스코키라는 동네에도 있었어요. 중학생 시절 아주 짧은 기간이었는데, 근데 그때 짓게 된 건 아니고 JJK라는 이름은 어렸을 때부터 늘 그냥 함께했던 이름이에요.






LE: 대구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그렇게 외국에서 살다가 다시 대구를 오신 건가요?


네, 그렇죠.






LE: 외국에 계셨던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정작 본토로 나가 있었던 건 2년 정도밖에 안 돼요. 중학교 시절에 잠깐 나간 거고, 대신 한국에 있는 외국인 학교를 되게 오래 다녔어요.






LE: 그럼 처음 힙합 음악을 접하신 건 외국에 계실 때였나요? 힙합 음악을 하게 된 시기나 계기가 궁금해요.


네. 처음 접할 때는 외국에 있을 때였죠. 근데 웃긴 게 미국에 들어가면 외국 힙합을 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니까 반발심 섞인 애국심이 투철해지면서 더 한국 것을 찾게 됐고, 그러면서 한국힙합을 더 듣게 됐어요. 처음에는 지누션 같은 랩 음악을 바탕으로 한 한국 가요를 들었죠. 그때 저한테 지누션의 1.5집이 있었어요. 다 영어로 한 랩이 담긴 앨범이었는데, 그걸 들으면서 ‘오, 이거 존나 멋있다.’라고 생각한 거죠. 말도 안 되게 유승준 랩 파트도 되게 좋아했고… 그런 한국 가요 안에 있는 랩을 처음에 듣다가 자연스럽게 YG 쪽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드렁큰 타이거(Drunken Tiger)의 1집을 접하게 됐어요. 그 앨범의 Skit을 들어보면 설명을 해줘요. ‘Hiphop, 이건 Culture, 문화. You Know What I’m Sayin?’, ‘랩은 라임이 맞아야 해. Rhyme, All The Time.’ 이런 스킷들이 있어요. 그런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아, 이거 존나 신기하다. 재미있다. 멋있다.’라고 하면서 그냥 단순히 랩보다는 힙합이란 것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LE: 그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바로 힙합 음악, 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었나요?


근데 그때는 음악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너무 외로워서, 친구도 별로 없는 구석탱이에 혼자 있는 애였기 때문에… 그래서 심심하니까 일기를 쓰는데, 그걸 랩의 형식을 빌려서 썼었어요. 그렇게 멋있어지고 싶은 마음에요. 제가 그 당시에 들었던 한국에서 나오는 초창기의 랩들을 흉내 내면서 일기를 쓴 거죠. 라임을 최대한 맞춰가면서요. 근데 그걸 반주에 맞춰가며 부른 것도 아니고 약간 슬램 형식으로 혼자 화장실에서 속닥속닥 대고 그런 느낌이었어요. 되게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었어요.






LE: 위키피디아에 JJK 씨에 대해서 굉장히 자세히 쓰여있던데, 대구 외국인 학교 축제에서 공연한 것이 음악적으로 뭔가를 한 것으로는 처음이었던 건가요?


맞아요. 근데 애매한 게 그때 본격적으로 처음 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리듬도 없이 라임만 맞춰서 가사를 쓰다가… (LE: 오히려 시 낭독에 가까운 형태였네요.) 네. 맞아요. 그러다가 인터넷에 제가 뭔가를 올리기 시작했죠. 'JPHOLE'이라는 김진표 씨가 만든 인터넷 공간에 올렸었죠. 그때는 개인 홈페이지가 많았던 시대라서 그전에도 이런저런 게시판에 가사를 올리고 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제가 그 가사를 직접 불러보고 싶어져서, 하지만 맞춰서 부를 MR이 없었기에 찾아다니다가 미디라는 걸 처음 알게 됐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미디는 그냥 반주라고 알고 있었던 상태였어요. 근데 누가 어떤 사이트에 스눕독(Snoop Dogg)이랑 투팍(2pac)같은 외국 래퍼들의 MR들을 다 미디 파일로 올려둔 걸 찾은 거예요. 그래서 웨이브도 아니고, MP3도 아니고, 그냥 제 컴퓨터에 기존에 있는 사운드카드가 제공해주는 선에서 미디 파일을 틀어서 그 위에다가 랩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가 미디라는 것에 대해서 좀 알게 되면서 ‘아, 그럼 내가 내 거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러면서 자작곡을 만들어서 아마 밀림닷컴(Millim.com, 이하 ‘밀림’)에 올렸을 거예요. 밀림에 한 세 번째 정도에 올렸던 곡을 학교 축제 때 라이브로 한 번 했었어요. 공연으로 따지자면 그게 처음이긴 하죠. 정확한 연도는 너무 옛날이라 생각이 안 나네요.






LE: 밀림은 물론, 대구 힙합 동호회도 거쳐 오셨다고 알고 있어요.


대구 힙합 동호회는 제가 거쳤다고 말하기에는 스쳐 지나간 거라… (웃음) 궤도를 싹 스쳐 간 느낌인데, 그냥 서로의 존재를 아는 정도였죠. 대구 힙합 동호회는 지금 현재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플로(Reflow)를 비롯한 친구들 전에 있던 집단이에요. 그 사이에 텀이 좀 있어서 한번 물갈이가 확 되고 다시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알기로는요. 그때 대구 힙합 동호회에 있었던 사람들이 국채보상공원에서 싸이퍼도 했었고, 제가 그 싸이퍼에 자주는 아니지만 한 두 차례인가 나가서 프리스타일도 하고 그랬죠. 그 중 한두 명이 힙합 트레인(Hiphop Train) 초창기 때 공연진이기도 했어요. 너무 옛날 일이라 아리까리하네요.






LE: 프리스타일은 그런 싸이퍼를 나가기 전부터도 계속 하셨던 건가요?


네. 프리스타일은 거의 랩을 입 밖으로 부르고 난 후로부터 얼마 안 돼서 꾸준히 했었어요.






LE: 근데 1집에 수록된 “그 누가 날 대표하는가”를 들어보면 ‘난 프리스타일 MC도 아닌데 니보다는 잘해.’라는 가사가 있더라고요. 실제로 본인은 프리스타일 MC라고 생각을 안 하시나 봐요.


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왜 그랬지? (웃음) 그때 당시에는 프리스타일 MC는 프리스타일만 하는 MC라고 생각했나?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근데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저는 그냥 노래를 만들고 쓰는 쪽으로 하고 싶었고, 프리스타일은 진짜 취미. 게임 하듯이 하는 느낌이었어서 그런 가사를 썼던 것 같아요.






LE: 밀림을 비롯한 활동하던 초창기 시절에 알고 지냈던 분 중에 혹시 저희가 알법한 분들이 있나요?


그때 제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때 봤던 사람으로는 빅딜 레코즈(Bigdeal Records)의 전신이었던 인펙티드 비츠(Infected Beats)라는 집단. 그때 거기 라임어택(RHYME-A-) 형도 있었고, 딥플로우(Deepflow)도 있었나? 그때 거기 되게 많은 프로듀서들도 있었어요. 그분들이 제가 밀림에서 활동할 때 알게 됐던 분들이죠. 이름을 들은 거죠. 제가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니었고요. UMC 형도 그때 “Shubidubidubdub”이라는 노래로 파격적으로 빵~하고 나왔었는데, 그때 UMC 형도 처음 알게 됐죠. 제가 밀림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올리고 할 때가 아마 MC 한새, UMC 형이 나오던 때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CSP. 소울 커넥션(Soul Connection) 멤버들을 대부분 밀림에서 만났다고 봐야죠. 그리고 지금 타이미(Tymee)하고 있는 이비아(E.via)했던 내퍼(Napper)라는 래퍼도… (전원 웃음) 그때 처음 알게 됐고요.






LE: 그럼 허클베리피(Huckleberry P) 씨를 처음 만나게 되신 건 밀림 시절이나 대구에 머물 때가 아닌 ADV 때였나요?


그보다도 전이에요. 제가 아예 처음에 랩은 안 하고 가사만 쓸 때죠. 가사만 쓰고 오디오로 녹음해서 올리는 방법을 모를 때요. 사실 아까 얘기했던 김진표 씨의 홈페이지인 'JPHOLE'이라는 사이트의 자작 게시판에 가사를 써서 올린 사람들이 지금 ADV의 전신이에요. 그때 허클베리피 형도 알게 됐고, 지금 같이 ADV하고 있는 조이레인 형도 그때 처음 알게 됐죠. 제 1집에 참여했던 사우스포(Southpaw)라는 형도 그때 만났었고요.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까지도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다 그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에요.






LE: 허클베리피 씨에 대한 존경이나 친분이 남다르신 것 같더라고요.


네.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죠. 아, 좀 전 질문에 해당하는 사람 중에 데피닛(Deffinite)도 있어요. 데피닛을 'JPHOLE'에서 처음 만났었어요. 한 동안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알던 그 사람이 데피닛이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만나서 ‘아! 그때 너!’ 이렇게 됐었죠. 그리고 지조. 지조도 'JPHOLE'에서 만난 건 아닌데, 데피닛이었나 정모 때 왔던 친구의 친구였나? 생각해보면 아마 몇 명 더 있을 거예요. 그리고 허클베리피 형 얘기를 다시 이어가 보면, 허클베리피 형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제가 15, 16살 때부터 만났는데, 그때 당시에는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정기적 모임이라고 해서 만나고 그랬었어요. 그때 거의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났던 형 중의 한 명이에요. 그러니 좀 남다를 수밖에 없죠. 지금 제가 알고 있는 형 중에서도 거의 제일 처음 만난 형이기도 하고, 제가 프리스타일이라는 걸 남에게 처음 들려줬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만나면 뭔가 당연히 노래방을 가고, 가면 당연히 프리스타일을 해야 할 것 같던 그 분위기 속에서 서로 프리스타일하는 걸 듣고 그랬던 것 같아요.






LE: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예전부터 친밀하신데, 지금에 와서 같이 결과물을 낸다든가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많죠. 실질적으로 대화도 오갔는데, 이게 웃긴 게… (웃음) 차라리 서로 아티스트로 인식을 해서 ‘피노다인(Pinodyne)의 허클베리피 형, 이번에 저희 뭐하나 해보죠.’ 이런 간지면 모르겠는데, 아무리 허클베리피 형이 잘되고, 제 활동이 계속 이어져 왔다고 해도 둘이 만나면 그냥 친한 사이고 그런 거예요. ‘우리 뭐 해야죠.’라고 말하는 거 자체가 되게 서로 웃기게 생각하는 거 있잖아요. 서로에게 단순히 업계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근데 간간이 이야기는 해왔어요. ‘아, 뭔가 해야 되지 않을까? 뭔가 하자. 재미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도 ‘우리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비트를 누구한테 받죠?’와 같은 실질적인 회의가 안되는 거예요. 만나면 ‘야, 뭐 재미있는 일 없냐?’ 이렇게 돼버리니까… (전원 웃음) 그러다 보니까 그 형이 다른 아티스트들이랑 콜라보 작업을 내는 건 더 빨리 되고, 오히려 오래 알았던 저랑은 빨리 안되는 그런 면이 확실히 있긴 있어요.






LE: 약간 아는 동생 챙기는 거랑 자기 친동생 챙기는 거랑 다른 느낌인 거랑 비슷한 거네요.


네. 거의 그 느낌이에요. 근데 하긴 해야 해요. 정말 서로 하고 싶기도 하고, 하자고도 말했고, 어떨 때는 ‘이번 년도에 해야지.’라고 하면서도 잘 안되네요.






LE: 근데 지금 인터뷰에서는 허클베리피 씨에게 형이라고 하시는데, 알기에는 친구처럼 대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웃음)


제가 중학생 시기를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무 외로워서 거의 사회 부적격자의 성격을 다 완성해버렸어요. 그래서 말도 없고, 사람들이랑 못 어울리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런 게 있는 상태에서 지금 ADV의 몇 세대 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나아졌었어요. 그때 허클베리피 형도 만났는데, 그때는 한국 사회의 '빠른'이라는 게 존재하는 줄 몰랐어요. 제가 85년 1월생이에요. 그리고 허클베리피 형은 84년생이고요. 서로 친구를 먹을 수 있는 줄 모르고 그냥 한 살 형이니까 형이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형의 친구들도 다 형. 저에게 존재하는 인간관계와 커뮤니티는 그쪽 사람들밖에 없어서 되게 오랜 시간 동안 별 문제 없이 형, 동생으로 지내다가 이쪽 힙합 업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아, '빠른'이라는 게 효율적으로 쓰이는 시스템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딥플로우, OK. 우리 친구, 더콰이엇(The Quiett), OK. 우리 친구. 더콰이엇은 지금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이런 거 말할 때 되게 예민하게 돼. 어쨌든 '빠른' 이용해서 85년생도 친구, 84년생도 친구를 했는데, 그렇다고 몇 년을 형이라고 한 사람한테 ‘너도 친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형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족보를 다 망가뜨리게 됐죠. 근데 뭐, 사실상 형으로 대우는 잘 안 해줘요. 그 형도 저를 동생으로 잘 생각 안 하는 것 같고…






LE: 사실 이 정도 친하게 지내왔으면 그런 게 무의미해지는 단계가 되기도 하죠.


네. 근데 그런 건 있죠. 리스펙이라는 건 있죠. 형, 동생으로서의 리스펙이 아니라 그냥 허클베리피라는 사람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되게 매력 있고, 배울 점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언도 많이 얻고, 리스펙을 하는 거죠.






LE: 좀 전에 'JPHOLE'에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ADV의 전신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JJK 씨가 ADV가 생기자마자 바로 들어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근데 앞서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어딜 들어갔다기보다는 그냥 그 모임이 어떤 집단, 크루로 변모하게 된 거죠?


맞아요. ADV라는 이름 자체가 생긴 건 이미 테두리가 미약하게나마 형성된 이후로 한 두 세대 후의 일이에요. 그래서 말하기 되게 애매해요. 그때 사람들이 사실상 ADV나 마찬가지인데, ADV라는 이름은 없었던 때라서 그냥 ‘ADV의 전신’이라고 표현하죠.






LE: 그런 당시의 멤버의 초기 멤버 구성은 어땠나요?


거의 1세대라고 부를만한… 근데 이름 말해봤자 모를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웃음)






LE: 그래도 말씀해주세요. (웃음)


지금은 거의 다 랩을 안 하지만… 근데 그 사람들을 쪽팔리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의 랩네임을 다 공개하자면… (전원 웃음) 인혼윌(印魂will)이라고, 지금은 지형이 형인데, 혼을 새길 거다. 해서 인혼윌. 그 형이 저희 사이에서 가장 큰 형이었어요. 근데 큰 형이라고 해 봤자 처음 만났을 때 21살이었어요. 그 형이 정신적 지주처럼 정모하면 저희를 다 이끌고 다니고, 삶의 선배처럼 다 이야기해주고 그랬어요. 허클베리피 형도 있었고, 노이섹섭(NoiSEXup)이라고… (전원 웃음) 이거 다 나가면 진짜 존나 웃기겠다. 사실 아직까지 다 알고 지내요. 허클베리피 형이 사는 합정장이라고 불리는 그쪽에 다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인터뷰가 올라가면) 엄청 웃길 거 같아요. 세민이 형이라고 있는데, 그 형이 옛날에 랩네임이 노이섹섭이었어요. 그리고 사우스포 형도 있었고요. 그때는 사우스포가 아니고 MC 혁이었어요. (웃음) 그 형 이름이 혁이어서… 그리고 조이레인 형도 있었고요. 조이레인 형은 그때부터 계속 조이레인 형이었어요. 그전에 말도 안 되는 이름도 있긴 한데, 그 형은 그래도 지금 ADV니까 그전 이름은 말 안 할게요. (웃음) 하여튼 되게 많았어요. 더퐈(theFFa)라는 형도 있었고요. 종권이 형도 있었고… 되게 많았는데, 거기서 한번 걸러졌죠. 그 이후 세대에 랩하는 멤버들이 또 있었는데, 그때그때 어울리는 멤버에 따라 멤버수가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어들었다가 했어요. 그러다가 조금 구체적으로 채워진 게 아까 말했던 인혼윌 형이랑 노이섹섭 형이랑 허클베리피 형이랑… 허클베리피 형은 그때 허클베리피가 아니었어요. 피군(Pg2on)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전원 웃음) 아, 진짜 재미있겠네. 그전에도 이름이 있긴 한데, 그래도 활동하는 사람이니까 거기까지는 안 갈게요. (웃음) 아무튼 그랬고, 피플로우(P-Flow)라는 팀이 있었어요. MC 혁이었던 사우스포 형이랑 조이레인 형이랑 지금은 캐나다 가서 자동차 정비하고 있는 소프트 제이(Soft J)라는 형으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소프트 제이라는 형이 데모 CD를 만들어놓고 갑자기 ‘난 캐나다를 가야 해.’라고 하면서 가고 피플로우는 2인 체제가 됐었죠. 그리고 카인슈르나(Kainsulna) 라는 형도 있었어요. UMC 형이랑 되게 많이 다녔었는데, 딴지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또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테두리가 약간 구체화됐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후에 멤버가 한번 확 걸러지고 제가 리더인 ADV가 되고, 그 후에도 또 한 번 확 갈아엎고 지금의 ADV가 된 거죠. ADV 얘기만 해도 아마 한 세 시간 할 거예요. 역사가 너무…






LE: 그럼 ADV라는 이름 자체는 누가, 어떻게 지은 건가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2000년도 중반쯤이었을 거예요. 그때 앞서 말했던 더퐈라는 형이… 본명은 화열, 화열이 형이에요. 지금은 디자인 쪽으로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 형이 센스가 남달랐어요. 저는 그때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요. 그때 저희 사이에 ‘야, 우리 이렇게 모이고 하는데 이름을 좀 지어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늘 숙제처럼 있었는데, 듣기로는 어느 날 제가 없는 자리에서 형들끼리 노래방에서 놀다가 그날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야, 우리 이름 좀 지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얘기가 나와서 뭐로 할까, 뭐로 할까 고민했대요. 병신 같은 이름들이 막 나오다가 더퐈 형이 ‘앙드레빌(Andreville)로 하자.’라고 했는데, 어감 좋다고 해서 OK하고 끝난 거예요.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 나중에 더퐈 형이 앙드레빌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전해 들었는데, 앙드레라는 프랑스의 어떤 사람이 만돌린을 연주하면서 어떤 마을 어귀에, 약간 저 혼자 생각에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들이 사는 동네에 간달프가 오는 그런 거죠. 앙드레가 만돌린을 연주하면서 들어오면 그 마을의 사람들이 다 환영해주고, 잔치하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앙드레빌이라고 했나 봐요. 물론, 그렇게까지 디테일한 걸 보면서 ‘좋은데?’라고 한 건 전혀 아니었고요. ‘앙드레빌 어감 좋은데? OK.’하고 앙드레빌이 된 거죠.






LE: 그다음에 그냥 ADV로 줄여서 쓰신 건가요?


한동안 계속 앙드레빌, 앙드레빌 하다가… 이것도 막 앙드레빌이냐, 안드레빌이냐, G가 있느냐 없느냐 하다가 앙드레빌이 되고, 줄여서 ADV. (웃음) 이렇게 얘기하니까 되게 멋이 없네요. 요즘 인터뷰하는 사람들 보면 되게 멋있는 말들을 많이 하던데… 근데 진실이 이래요. (웃음)






LE: ADV 얘기는 뒤에 또 있으니까 천천히 해볼게요. 이후에 랩어택(Rap Attack)과 같은 활동들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비공식적인 활동들이었고, 그때 그 나름의 세계가 있었잖아요. 그리고 JJK 씨는 그 한가운데 있으셨는데, 그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음악에 임하셨었나요?


제가 첫 앨범도 [비공식적 기록]이라고 한 게 그런 의미였어요. 힙합플레이야 중심의 한국힙합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는 저는 너무나 활발하게 해왔는데,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아무도 언급도, 샤라웃도 안 해주고… 그때는 트위터도 없었고요. 그래서 약간 억울한 감이 늘 서려 있었어요. 밀림에 계속 곡을 올리면서 분명히 인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존 래퍼들은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쟤 존나 구려.’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랩 배틀에 나가서 거듭 우승을 했지만, 딱히 제가 진입되는 느낌은 안 들고요. 프리스타일 판에서, 배틀이 아닌 싸이퍼를 개최하자고 하면서 이런저런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뭔가 전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은 안 들어서 억울했던 것 같아요. 늘 기존 판에 대해서 억울했었던 것 같아요. 밀림 판에서 제가 중심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밀림 출신의 래퍼로서 살아남은 래퍼를 언급할 때 제가 들어가 있었고, 그 밀림 전체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한 적이 있었고요.


국내 프리스타일 판, 싸이퍼를 이야기할 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랩어택인데, 랩어택 같은 경우에는 ADV랑 관련 없이 저랑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솔잎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솔잎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크레이지 C(Crazy C)라는 이름으로… 아, 되게 유치한 이름을 왜 지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아무튼 크레이지 C라는 이름으로 변경을 하고 활동했던 친구가 있었고요. 또, 지금은 아니지만 ADV의 프로듀서로도 있었던 저의 오랜 친구인 시도(Ceedo)라는 친구랑 지금은 선생님하고 있는 로우파이(Lo-Fi)라는 재준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이렇게 4명이서 랩을 사랑하는 모임, 줄여서 랩사모라는 다음 까페를 운영했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다음이 우리를 좋게 봐서 그런지, 우리 까페를 페이지 메인으로 띄워주면서 한순간에 엄청난 사이즈가 됐었는데, 정글 라디오(Jungle Radio)처럼 자작곡도 올리고 그러는 인터넷 커뮤니티 중의 하나였어요. 그러다가 랩사모 정모에 나갔는데, 당연히 다 랩하는 사람이었죠. 근데 랩하는 사람들이 고기나 구워먹고, 술이나 마시고 이게 뭔가 해서 프리스타일을 하자고 했죠. ‘랩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면 당연히 싸이퍼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해서 초창기에 한 몇 차례는 이름도 없이 그냥 싸이퍼였어요. 사실 랩사모는 뭔가 이상한 애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솔잎이라는 애가 ‘10대 애들은 못 들어오게 해.’라고 하면서 강력한 조치를 취했어요. 근데 개념 있는 10대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억울했던지라 동의는 안 받은 채로 자기들끼리 TRSM이라는 이름의 틴 랩사모라는 걸 만들었었죠. 그래서 거기서도 정모를 하게 됐고, 그 정모를 주최했던 스넥(Snake)라는 애가 거기서도 싸이퍼를 열게 됐는데, 훗날에 보니까 랩사모는 쇠퇴하게 되고 오히려 틴 랩사모가 잘되면서 제가 걔네들이 한 세네 번째 싸이퍼를 할 때 나갔었어요. 싸이퍼도 잘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야, 이거 아예 이름을 붙여서 하자.’라고 하고 스넥이랑 저랑 합심해서 만든 게 랩어택이에요. 진짜 기네…




그래서 저는 이게 억울했어요. 만약에 이게 역사 속에 기록이 됐다면 인터뷰할 때 이렇게 쓰잘머리없이 말을 안 했겠죠.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근데 이 역사 뒤편에 있었던 나름 한국힙합에 되게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들이 특정 커뮤니티, 레이블, 크루들 중심으로만 신이 흘러가는 이 분위기 속에서 다 묻힌 거예요. 이런 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요. 랩어택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는 크루셜 스타(Crucial Star)도 있었고, 키디비(Kitti B)도 되게 오랫동안 왔었고, FT 아일랜드(FT Island)의 멤버 중 하나도 있었고, 어글리덕(Ugly Duck)도 있었어요. 지금 되게 잘된 래퍼들이 랩어택을 거쳐 갔어요. 그때 당시에는 다 꼬맹이들이어서 저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까 다 잘돼있던 거예요. 근데 그 친구들이 왜 랩어택을 샤라웃을 안 하게 됐느냐는 거죠. 만약에 이게 다 역사 속에서 인정을 받았으면 걔네들도 자랑스럽게 샤라웃을 치고 남겼을 텐데… 그리고 저와 스넥이 주도했던 이 문화가 정말 가치 있게 인정받았으면 훨씬 더 풍부하고 많은 프로그램이 그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거예요. 마치 랩어택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술제이(Sool J) 형이 프리스타일 타운(Freestyle Town)을 만들고, 그걸 전국적으로 퍼뜨려서 술제이 형의 작품은 많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술제이라는 이름을 역사 속에서 뺄 수는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늘 억울했어요. 그리고 그때 힙합 신 전반적으로 서려 있던 소위 말하는 ‘감성힙합’? 뭔가 진실적으로 말하고 소소한 일상을 말하는… 그런 데에 반해서 저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지명이나 사람 이름도 그냥 다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어설프게 돌려서 ‘누구누구는 이랬네.’ 이런 게 아니고 파파파파파! 막 이야기하는 게 저는 속 시원하고, 너무 좋고 그랬어요. 그런 힙합의 매력에 빠져있었던지라 늘 그런 억울함이 서려 있었죠.






LE: 많은 시간이 흐른 인제야 그런 비공식적인 모든 것들이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됐네요.


네, 맞아요.






LE: 그럼 “비공식적 기록”을 들어보면, ‘이때 난 이미 고시원 in 홍대 city’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언제쯤 홍대로 올라오셔서 그런 랩어택을 비롯한 활동을 시작하신 건가요?


20살인가, 21살이 되고 나서 조금 후였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저희 어머니가 늘 ‘20살이 되면 독립’이라는 관념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근데 그에 비해서 저는 너무도 인생에 대해서 큰 고찰이 없던 그냥 맹탕맹탕 사는, ‘난 랩만 할 수 있으면 돼.’ 약간 이런 느낌이어서 별 생각 없이 살았어요. 근데 어머니가 나가서 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그림 그리는 것도 되게 좋아했었거든요. 홍대 쪽에 3D 그래픽 학원에 다니려고 서울로 올라오면 학원에서 가까운 고시원을 알선해주니까 거기서 공부하면서 지내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 씨. 음악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없었어요. 전 그냥 (서울에 가면) 랩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친한 ADV 형들도 다 서울에 사니까 ‘좋네.’하고 올라왔죠. 그렇게 해서 여기 홍대에 있는 호미화방 위에 있는 2평짜리 고시원으로 들어갔죠. 그렇게 일단 학원을 가긴 갔는데, 제가 학원을 잘 다닐 성격이 아니라… (전원 웃음) 어머니는 잘 다닌 걸로 알고 계시지만… (웃음)






LE: 이것도 비공식적 기록이네요? (웃음)


네, 그렇죠. 한 1주일 정도 가다가… 랩이 재미있어서 랩만 하던 그런 때가 있었죠.






LE: 당시에 프리스타일 대회도 많이 나가셨고, 우승도 많이 하셨는데요. 그런 활동들이 어떤 특정 집단, 커뮤니티에 진입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그냥 약간 무턱대고 하셨다는 느낌도 들어요. 또, “비공식적 기록” 가사에 보면 ‘더블케이(Double K) 형에게 16마디의 기회를 받았지.’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프리스타일 대회, 무브먼트(Movement), 더블케이 씨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궁금해요.


그러니까 아… 진짜 길다. 미안해요. (LE: 아닙니다.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생각하는 힙합다운 행보는 뭔가 프리스타일… 길에서 랩하고, 배틀해서 이기고, 그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믹스테입이 나오고, 거기서 또 인정받으면 레이블의 콜을 받거나 앨범이 나오는 그런 단계를 밟는 것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때 당시에 믹스테입의 개념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저는 그런 단계라고 해야 하나? 제가 앨범을 내기 전에 한 명의 MC로서 그 후드에서 인정을 받는? 그 단계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때 그러기에는 요즘도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시장 자체가 그런 걸 인정해줄 수 있는 시스템도 없고, 끌어올려다 줄 시스템도 없는 시대였어요. 하지만 그냥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프리스타일을 늘 길에서 했었고, 그런 행동들을 언제나 동경해왔기 때문에 제가 기회가 닿는 선 안에서 그런 동경심을 표출해온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지조가 클럽 큐보(Q-Vo)라는 데서 랩배틀을 한다는 거예요. 그때는 이름이 흐지부지였는데…






LE: 아, 클럽 이름이 흐지부지라고요?


네. 클럽 이름이 흐지부지였는데, 이후에 이름이 큐보로 바뀌었을 거예요. 아무튼, 그때 당시에는 클럽 사장들이 뭔가 미쳤던 건지, 한창 엠넷(M.Net)에서 클럽을 찍는 프로그램들이 많고 난 직후여서 그런지 뭔가 힙합다운 그림을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았었어요. 그래서 랩배틀을 자주자주 열려고 했었어요. 그걸 지조가 얘기해주는데, 상금이 100만 원이라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 100만 원을 상금으로 준다는 건 말도 안되는 거였어요. 근데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제가 진짜 배틀을 한 적은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근데 지조가 자기도 혼자 나가기 좀 그러니까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지조 프리스타일 진짜 잘했었어요. 저도 관심이 있고,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경험 삼아 같이 했죠. 예선에 나갔어요. 처음에는 그냥 배틀이 아니라 자유 주제로 프리스타일을 하는 형식이었어요. 아마 그때 나왔던 사람 중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래퍼도 몇몇 있을 거예요. 이건 말하면 그 사람들에게 타격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보호해줄게요. (전원 웃음) 왜냐하면, 본선까지 나갔는데도 제가 이긴 사람이 있거든요. 보호해줄게요. 한국힙합은 좁으니까… (웃음) 아무튼 그렇게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본선 전날에 진 다 MC(Jin da MC)가 그 당시에 몇 주 연속 1위를 하던 영상들이 익히 알려진 상황이라서 그걸 다 찾아보면서 ‘배틀은 이런 간지구나.’라고 느끼면서 속성으로 그 간지를 취득했죠. 그러고 다음날 가서 그 (진 다 MC의) 느낌을 써먹으려고 했는데, 그날 클럽 관계자가 랩배틀하는 사람들을 클럽 밖에 모아놓고 ‘자, 오늘 여러분들이 되게 잘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2층 VIP 실에 무브먼트 식구들이 모두 다 왔어요. 여러분들이 아는 바비킴(Bobby Kim)과 더블케이, 리쌍의 길, 셔니슬로우(Sean2slow) 다 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잘하면 큰 기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사실 저는 그때까지 ‘정말 그러겠어? 올라가서 잘하면 다행이지.’하고 말았고, 솔직히 저는 무브먼트보다 100만 원이 더 관심이 가있는 상황이었어요. 무브먼트는 ‘만나면 재미있기는 하겠다.’ 이런 느낌이었고요. 아무튼, 올라가서 잘했어요. 그날따라 느낌이 좋고, 잘 풀려서 1등을 하게 된 거예요. 사실 그때 당시에 제가 한 프리스타일이나 배틀을 뛰었던 랩들은 그냥 빠르기만 하고, 즉흥적으로 라임이 몇 개만 맞을 뿐이지, 지금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잘하는 랩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시대적으로 그때 당시에 제가 제일 잘하긴 했던 거 같아요. (웃음) 아무튼 그래서 1등을 먹으니까 그때 5만 원 짜리가 없었던 시대라서 현금으로 100만 원을 큰 봉투에 넣어서 사장이 무대 위에서 그냥 주는 거예요. 저는 그래도 좀 ‘내려가면 주겠지.’ 싶었는데…






LE: 완전 힙합인데요?


그러니깐요. 다 춤추고 여자 꼬시러 온 애들, 헐벗은 여자애들이 NB 간지로 무대 밑에 꽉꽉 차있는데, 무대 위에서 제가 100만 원을 받은 거죠. 그때 당시에 저는 인간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차서 ‘아, 내가 100만 원을 얻었다는 걸 여기 수많은 사람이 봤는데 삥 뜯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가득해서 ‘아, 씨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지.’라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후드 안에 돈을 숨겨서 나가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제 팔을 잡더니 저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이게 뭔가 싶은데 그 사람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자꾸 ‘위로 가요! 위로 가요!’라고 하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무브먼트 사람들이 한번 보자 해서 올려준 것 같더라고요. 가니까 그때 당시에 저로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죠. 앞서 말했던 그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아, 더블케이 형은 그때 없었어요. 어안이벙벙하죠. 제가 어릴 적에 들었던 뮤지션들을 다 실제로 본 거니까요.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고 그랬는데, 리쌍의 길 씨가 저한테 ‘야, 너 지금 여기 안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인 것 같아? 니가 해본 공연 중에 가장 많은 관객이 든 게 얼마나 됐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 제가 행사에서 8백 명 앞에서 공연한 게 제일 많은 수였어요. 저 나름대로는 으쓱하면서 ‘저 8백 명 앞에서 해봤습니다.’라고 했더니 ‘야, 니가 8천 명 앞에서 해봤어? 아니, 8만 명 앞에서 해봤어? 그건 완전 다른 스케일이야.’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딱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야, 나도 참 외로운 사람이야. 나랑 같이 만나고, 음악도 듣고, 같이 한번 해보자.’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전화번호 받고, 셔니슬로우 형도 그때 안면 좀 트고… 아, 그리고 그때 알고 보니까 더블케이 형은 다른 테이블에 있었대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 날 길 씨에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는데, 안 받는 거예요. 왜 안받나 싶었는데, 그때 저는 한번 물면 진짜 하고 마는 스타일이었어서 그 사람이 일상생활이 안될 수준으로 전화하고 문자를 했었어요.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 때문에… 계속 보냈어요. 끊임없이 그렇게 하니까 길 씨가 ‘야, 자기 길을 자기가 개척하는 거야.’라고 보낸 거예요. (전원 웃음) 그래서 “비공식적 기록”을 들어보면 연락을 계속 했는데 왜 안받냐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이 사건인 거죠.


그리고 더블케이 형은 제가 배틀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가 피플로우 형들이 아는 형이 콘서트, 파티 플래너였어요. 그래서 그 파티 플래너 형이 더블케이 형이랑 배치기랑 같이하는 콘서트를 주최하게 됐는데, 그 형이 우리를 안타깝게 봐서 피플로우 형들 보고 ‘야, 너네 좀 와서 인사도 하고 인맥도 트고 해.’라고 해서 백스테이지로 넣어준 거예요. 그러면서 저도 피플로우 형들이 가니까 같이 가준 거죠. 가서 더블케이 형에게 인사하니까 더블케이 형이 저를 알아보고 그때 자기도 있었다고, 배틀 잘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혼자 하는 거 나도 겪어봐서 정말 외롭고 힘든 거 다 안다고… 그러면서 번호를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형 딴에는 저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같이 불러서 놀기도 하고 그랬죠. 저는 완전 농구 못하는데, 미군 부대 흑인들이랑 농구 시키고… (전원 웃음) 근데 저는 또,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래도 할 줄은 압니다.’라고 하면서 같이 해서 개발리고… 그런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16마디의 기회를 받았지.’가 뭐냐면, 그때 더블케이 형이 제 앨범에 참여해주는 거였어요. 그리고 더블케이 형 첫 앨범에 저를 피처링을 시켜주겠다는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진짜 말도 안 되는 기회였죠. 그게 성사되든 안 되든 그 자체가 그냥 은혜로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담은 한 구절인 거죠.






LE: 이 이야기가 지금 이야기의 전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알기에는 이적 씨가 하는 라디오에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가 출연했을 때 DoubleJ K로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한번 나왔었죠. 그때 <이적의 Dream On>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다이나믹 듀오 분들이 청취자들이 보내는 랩 곡들을 평가를 해주는 그런 코너가 있었어요. 수요일마다 했었나? 그랬는데, ‘그런 게 있나 보다.’하고 저도 그때 당시에 밀림에 올렸던 곡을 거기에 제출했는데 뚫린 거예요. 근데 그때 다이나믹 듀오 분들이 너무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진짜 짱이다.’, ‘정말 잘한다.’, ‘저희보다 잘하시는데요?’ 이랬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다이나믹 듀오 분들이 LJ였나? 말 가면 쓰고 나오는 되게 웃긴 매니저분이랑 활동하던 때였는데, 그때부터 아메바컬쳐(Amoebaculture)라는 걸 만들려는 움직임이 조금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제 가사에 아메바컬쳐에 관한 내용도 나오고 그랬었는데, ‘이거 계약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오, 이건 놓칠 수가 없는 기회야.’라고 해서 제가 그 프로그램 작가분에게 다이나믹 듀오 분들 매니저랑 좀 연결해주면 안 되냐고 해서 작가분이 매니저분에게 제 연락처를 넘겨준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아쉽게 됐네.’ 하고 말고 그 라디오에 나온 부분을 따서 [비공식적 기록]의 2번 트랙인 “Makes The Way”의 뒷부분에 나오죠. 그 곡의 ‘인맥 때문에 다 안 돼. 아는 사람 있어야 할 수 있어. 하지만 난 실력을 이미 인정받았어.’라는 내용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 라디오에 나온 부분을 넣은 거죠.






LE: 그런 라디오나 무브먼트와 만났다든가, 더블케이 씨에게 기회를 받았다든가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던 시기가 1집 내기 전인 2005,6년쯤이었나요?


맞아요. 그때쯤이었던 거 같아요. 셔니슬로우 형이랑도 독특한 인연인 게 가라사대라는 레이블이 출범할 때였어요. 거기서 오디션 같은 걸 해서 제가 지원했었는데, 그때 제가 뚫렸었어요. 근데 제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당시에 인간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찬 때라 계약서를 내밀면 ‘이거 또 잡히고 그러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을 해서 괜히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저희 어머니가 동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보류를 했었는데, 셔니슬로우 형한테 이걸 빌미로나마 상담을 받고 싶어서 싸이월드 쪽지를 보냈었어요. ‘아, 저 그때 누구인데, 제가 상담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라고 보내니까 알려주시고 만나게 됐어요. 만나서 제 상황을 말씀드리고 그러는데, 셔니슬로우 형이 조금 이따가 한 명 더 온다고 그러셨는데 타이거 JK(Tiger JK) 씨가 온 거예요.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때 셔니슬로우 형이 타이거 JK 씨한테 ‘얘가 프리스타일 하는 걸 직접 봤는데, 나는 한국에서 프리스타일로 그 정도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걸 처음 봤다. 말이 안 된다.’라고 하셨어요. 그때 TBNY 앨범이 준비 중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한 자리라도 줄 수 없느냐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뭔가 인생이 역전이 되나 싶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거기가 타이거 JK 씨가 잘 알던 카페였는데, 아무도 없고 저희만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 CD를 카페 전체에 다 들리게 트는 거예요. ‘역시 간지야.’ 했죠. 근데 그때 당시에 제 랩이 솔직히 진짜 구렸어요. 너무 아마추어 래퍼들이 할만한 랩이었어요. 그때 들으시고 요즘은 랩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캐릭터가 중요한데, 그게 좀 부족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랩을 잘하는 게 아니라 더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그때 당시에는 저는 그 말을 이해를 못 했죠. 하지만 뭔가 뜻이 있겠거니 했죠. 왜냐하면, 타이거 JK니까요. 그러고 나서 먼 훗날이 되어서야 그 말을 깨닫게 됐죠. 아무튼, 그렇게 얘기가 오고 가고 나서 계획이 좀 아쉽게 됐는데, 저도 그걸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셔니슬로우 형이랑 알게 됐죠. 셔니슬로우 형은 제가 죄송하면서도 감사한 게 제가 (셔니슬로우 형한테는) 한동안 연락을 못 드렸거든요. 매년 새해 될 때마다 문자를 드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가 연락 드리기도 죄송해서 끊게 됐는데, 제가 언제 한번 선글라스가 부러졌었어요. 하이비션(Hybition) 선글라스가 부러져서 ‘헐’하고 그냥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셔니슬로우 형이 하이비션 분들이랑 관계가 있다 보니까 ‘야, 너가 나한테 청첩장 보내주면 내가 이거 새것 줄게. A/S 해줄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근데 원래는 제가 먼저 청첩장 보내고 해야 하는 건데, 너무 죄송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연락이 됐었죠. 근데 그때 셔니슬로우 형이 바쁘셔서 결혼식은 못 오셨어요. 근데 그게 또 미안하다고 결혼 선물을 보내주신 거예요. 진짜 말도 안 되는 형이에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근데 그 이후로 또 제가 인사를 잘 못 드렸거든요. 정말 죄송하네요…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 인터뷰를 통해서 전하네요. 아무튼, 그런 인연이 있었어요.






LE: 이제 1집 얘기를 좀 할 텐데요. 그전에 지금까지 아티스트, MC로서의 과정에 대해 이리저리 이야기해봤는데요. 그러는 중에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중간에 대학교를 두 번이나 옮기셨다고 알고 있어요.


처음에는 백석예술대학을 갔고, 그다음에 추계예대를 갔고, 그다음에 한참 있다가 경기대를 갔어요. 왜 그랬느냐면 저희 어머니가 학력에 대해서 좀 확고한 신념이 있으신지라… 약간 ‘Give & Take’이죠. (웃음) 어머니에게 계속 음악할 거라고, 랩할 거라고 했는데, 사실 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염치가 없더라고요. 하라는 거 다 안 하고 맨날 제 마음대로 사는데, 그래서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어머니가 가장 중요시하시는 게 학력인 것 같아서 그걸 최대한 맞출 수 있을 만큼 하겠다, 그 부분에 있어서 포기하겠다고 했죠. 처음에 백석예술대학은 2년제였어요. 학점은행제로 2년제, 2년제가 끝나니까 ‘그래도 4년제는 해야지.’라고 하셔서 3, 4학년 더 연장해서 추계예대. 추계예대를 다 마치니까 ‘학점은행제로 딴 졸업장은 효력이 없어. 정식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셔서 경기대 편입. 그렇게 된 거예요.






LE: 과는 어느 쪽이었나요?


늘 음악 관련이었어요. 실용음악과로 백석예술대학과 추계예대를 학점은행제로 다녔고, 경기대로 넘어와서도 전자디지털음악과였어요.






LE: 얀키(Yankie) 씨가 경기대 전자디지털음악과 아닌가요?


맞아요. 거기 졸업하셨을 거예요.






LE: 그럼 경기대는 이제 졸업하셨나요?


아니요. 휴학 때려놓고 뻐팅기고 있어요. 근데 솔직히 저는 진짜 학력 쪽으로 그렇게 욕심이 없고, 또 어머니도 제가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모르셨나 봐요. (전원 웃음) ‘대충 한 25, 6살 되면 관두겠지.’라고 생각하셨는데, 얘가 계속 하고 조금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고 하니까 인제야 어머니도 학력보다 커리어가 먼저가 됐어요. 그전까지는 늘 ‘그래도 인생이 먼저다. 학력이 먼저다.’ 이런 생각이셨는데, 처음으로 커리어가 더 앞선 게 얼마 안 됐어요. 되게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제가 막 마마보이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렇게 보일까 봐… (웃음)






- [비공식적 기록] -




LE: 다시 커리어 얘기로 돌아와 볼게요. 첫 앨범에 수록돼있는 “비공식적 기록” 가사에도 나와 있듯이 정식 음원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2004년 프로듀서 조성빈 씨의 EP 앨범에서고, 이후에 슈가하이 뮤직(Sugarhigh Music)이라는 곳과 계약하셨어요. 그 외에도 곡에는 그 사이에 JNPB를 만나고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 당시 그런 일들의 자세한 과정들이 궁금해요.


그때 계속 (진입되지 못하면서) 멈춤 단계에 있는 것 같았고, 저 자신이 재촉당하는 느낌에 쌓여있었어요. 억울함과 급한 마음… 언제까지고 밀림이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아마추어적인 활동을 이어갈 수는 없고 어느 한순간에는 프로로서 뛰어야 하는데, 그 분기점이 너무 오지 않았던 터라 늘 답답했었어요. 그러다가 DJ 베이(DJ Bay) 형이랑 그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형이 뭔가같이 하자고 해서같이 하게 됐는데, 그때 당시에 저는 첫 계약이었어요. 그래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근데 사실 그 형이 저에게 해준 것도 거의 없었어요.






LE: 말만 그냥 회사이고, 소속 아티스트였던 거군요.


네. 저는 그때 아는 게 너무 없었어요. 회사가 뭘 해주는 건지도 모르는 수준이었어요. 진짜 저는 그냥 늘 랩만 해오던 애였으니까… 그러니까 앨범을 만들어야 하는데, ‘늘 하던 대로 해.’ 약간 이런 느낌인 거예요. 근데 늘 하던 대로 할 수가 없죠. 전 그때 고시원에 살던 때니까요. 그때 제가 회사면 돈도 투자해주고 뭘 찾아봐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싸워야 했던 거였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결국 그냥 저의 끄나풀을 최대한 이용해서 녹음도 당시 소울 커넥션 작업실에서 했었어요. 그리고 그때 냈던 음반의 온라인 음원의 수익도 저에게 전혀 오지 않아요. 그건 다 DJ 베이 형이 가지고 있어요. 근데 DJ 베이 형이 저에게 그렇게 나쁘게 얘기는 안 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제가 다 몰라서 그렇게 된 거였어요. 온라인 음원도 계약상에 다 명시되어 있는 거고, 심지어 그 형이 설명도 다 해줬었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 저는 ‘온라인 음원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어? CD가 많이 팔려야지.’ 약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러니까 바보지. 심지어 한참 지나고 나서 (DJ 베이 형이) ‘음원 다 다시 돌려줄게. 준비되면 말해.’라고 얘기했는데, 제가 제 인생에 집중하다 보니까 반쯤은 귀찮고 하면서 받을 시기를 한번 놓쳤어요. 그때 했어야 됐었는데… 그냥 엄연히 제가 잘 못 챙긴 거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앨범이 나왔고…






너무 옛날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때 당시에 조성빈 EP 앨범에 제가 처음으로 CD에 제 랩을 올리게 됐어요. 그때는 제가 홍대 고시원에 살면서 미디앤사운드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구인/구직 란에 랩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것들을 제가 다 지원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가요 랩 디렉터, 행사 등등 랩으로 할 수 있는 건 진짜 다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홍대 연습실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행사를 맡아서도 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기 오면 행사를 뚫을 때 사용할 행사팀을 하는 거고, 연습실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더라고요. 저는 잘됐다 싶어서 그 일을 하게 됐죠. 그래서 행사 섭외 오면 하고, 연습도 하던 찰나에 조성빈 EP 앨범을 만드신 제작자분이 연습실로 오셨었어요. 그 제작자분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다음 까페에서 되게 유명한 ‘힙합 명반’? 그런 카페의 주인장이더라고요. 그 제작자 분이 이번에 까페 회원 중에 조성빈이라는 프로듀싱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앨범을 기획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에 신인이었던 딥플로우(Deepflow)랑 저랑 웜맨(Warmman) 형이랑 같이 하려고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좋으니까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인연이 생기고, 어떻게 됐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펜토(Pento)랑 JA 형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둘의 소개로 브라운 비트(Brown Beat)라는 레이블에 속하게 됐죠. 그런 사연을 그냥 쭉 쓴 거예요. ‘이런 흐름 속에서 나도 이렇게 나오게 됐어.’ 이런 거죠.






LE: 슈가하이 뮤직이 레이블답지 않은 레이블이긴 했겠지만, 어쨌든 레이블이잖아요. 근데 [비공식적 기록]을 들어보면 되게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잖아요. 앨범을 내기 전에 그런 부분에 대한 제지가 있지는 않았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그게 좋은 점이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말 그대로 레이블 아닌 레이블인 거죠. ‘알아서 만들어서 내. 프레싱 비용 내줄게.’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힙합플레이야에 뉴스를 낸다든가 하는 걸 제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걸 대신해주나 보다.’ 생각했었죠. 사실 DJ 베이 형을 통해서 힙합플레이야 스태프분들을 처음 알게 됐어요. 그때 CD가 나왔으니까 인사드리고 했는데, 힙합플레이야 대표님이 그때 당시 힙합 분위기상 이런 식의 너무 강렬한 색깔의 음악을 하면 한국힙합 특성상 잘 안 될 거고, 힘들 거라고 말씀하셨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내가 나중에 잘되면 꼭 가사에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최근에 나온 “비공식적 기록 Ⅱ”에 담아냈죠. 그걸 듣고서 대표님이 전화하셨는데, ‘혹시 내 이야기니?’라고 하시길래 ‘네. 맞아요.’라고 했죠. (전원 웃음)






LE: 앨범에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잖아요. 타블로(Tablo) 씨 얘기도 담겨 있고, 팔로알토(Paloalto) 씨 얘기도 담겨 있고 한데, 사실 검색하면 알 수 있고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니는 이야기긴 해요. 그래도 최근에서야 힙합, ADV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팬들은 또 모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각 이야기에 대한 개략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일단 이 부분에 대해 말하기 전에 얘기하고 싶은 게 그 사실을 아는 에픽하이(Epik High) 팬분들은 아직도 저를 욕하세요. 그만큼 에픽하이가 엄청난 사이즈의 팀이었고, 또 타블로라는 사람이 힙합에서 가지고 있는 포지션 자체가 어마어마하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듭 말하지만 2006년도의 일이라는 것. 우린 2014년도에 살고 있고요. 제가 21, 22살 때의 일이고, 심지어 이 일이 발단된 일은 그로부터도 1년 정도 전이에요. 그러니 너무 과거의 이야기니까 이걸 그냥 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걸 말하는 데에서 조심스러운 이유는 저는 타블로 씨에게 전혀 악감정이 없어요. 시간도 많이 지났고요. 또, 타블로 씨도 아이가 있고, 저도 결혼했고 아이가 태어날 상황인데, 아직도 ‘야, 씨…’ 이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웃음) 하지만 확실한 건 후회는 안 해요. 그때 제가 벌렸던, 그때 제가 디스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후회는 절대 안 해요. 왜냐하면,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아, 그때 디스 안 했어야 했어.’가 아니라 ‘더 멋있게 할 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게 아쉬워요. 그때 제가 했던 행동들, 타블로 씨와 만나서 대화를 나눴을 때 했던 말들은 저의 진심이긴 했지만, 제대로 전달이 안 됐었어요. 심지어 사실 만났을 때 제가 뭐라고 말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제가 몇 마디 안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너무 멋이 없었어요. 곡에서 했던 말들, 그 이후의 대처들 모든 게 너무 멋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에 돌아간다면 더 멋있게 디스를 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악감정이 남아있어서 후회를 안 하고 그런 건 아니라는 거죠. 한국힙합 팬으로 봤을 때 그 사건은 멋이 없었어요. 일단 그렇고요.


그때 상황의 정황은 홍대 놀이터에서 랩어택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타블로 씨가 저 멀리서 촬영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타블로 씨와 제작진들이 어쩌다 슬슬 홍대 놀이터 쪽으로 옮겨오더라고요. 방송 관계자들이 타블로 씨가 래퍼니까 뭔가를 따내야 할 것 같아서 그쪽으로 인도한 거죠. 또, 타블로 씨도 힙합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온 거겠죠. 솔직히 그때 제가 프리스타일을 잘못하긴 했는데, 그래도 에픽하이 실망이라는 이야기를 랩에 담았었어요. 진심으로 난 에픽하이 1집이 한국힙합의 대안이 될 줄 알았다고 얘기했죠.






LE: 3집 앨범에 대한 실망을 얘기하신 거겠죠?


네. ‘2집까지는 그래도 좋았지만 3집부터는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건 힙합이 아니다. 너무 실망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지금이라면 아마 그렇게 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카메라 있고 그러니까요. 그때 저라서 할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아무튼, 그렇게 프리스타일을 했어요. 저는 그때 힙합이면 당연히 프리스타일로 뭘 했으면 그럼 프리스타일로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답으로 한 프리스타일이 랩이 더 좋아? 그럼 난 졌어. 아니면 내가 한 방 먹였어. 그럼 이겼어. 이런 단순한 논리였어요. ‘상대방이 MC니까 당연히 랩을 하겠지?’ 싶었는데, 랩을 안 하는 거예요. 그냥 와서 말 한마디 던지고 그냥 가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너무 억울했는데, 제가 그 한마디는 좀 조심스러워요. 왜냐하면, 저랑 타블로 씨랑 만나서 이야기했을 때, 타블로 씨는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고, 저는 정확히 들었다고 했거든요. 그렇게 만나서 이야기했을 때 저는 답이 안 나오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안 했다고 말하지, 난 그 말을 기억하지, 20대가 넘은 두 사람이 만나서 ‘했는데? 들었는데?’, ‘아니 나 안 했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번져나가면 술 마시고 깽판 싸움나고 그런 거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풀자고 했죠.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타블로 씨가 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있고, 저도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고… (웃음) 아무튼 그래서 OK하고 넘어가기로 했어요. 넘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때 들었던 그 말이 이 말이야.’라는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저는 너무 납득이 안되고, 화가 나고, 실망이어서 담아뒀었는데, 그때 방송국 스태프들은 가고 저희는 그 자리에서 계속 프리스타일을 이어갔죠. 근데 타블로 씨가 방송국 스태프들을 다 떼고 혼자 다시 왔었어요. 다시 와서 촬영 때 못했던 프리스타일을 했었어요. 근데 프리스타일이 제가 했던 말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냥 힙합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프리스타일이었어요. 그리고 자기 음악에 대한 설명을 말로 하더라고요. 힙합에 대한 다양성, 그 당시에 나왔던 퍼렐(Pharrell)이나 엠플로(M-Flo)같은 아티스트를 예로 들면서 나름 설득을 하셨어요. 그리고 타블로 씨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같은 크루로 보였을 법한 랩어택에 순순히 랩을 하러 온 친구들은 타블로 씨의 싸인을 다 받아갔죠. (웃음) 그분이 봤을 때는 ‘같은 크루인데 오히려 내 싸인을 받아가네? 병신.’ 약간 이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같은 크루가 아니었다는 점!




아무튼, 그런 해프닝이 그때 당시 제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됐었고, 그래서 앨범을 내면서 ‘비공식적 기록’이라는 타이틀 아래 ‘이 모든 것들이 있었던 일이지만, 너희는 다 모르는 한국힙합 저 뒤편의 역사야.’라고 하면서 다 말한 거예요. 그렇게 타블로 씨와 저는 대화를 통해서 아무 문제 없이 끝냈어요. 플랫하게 모든 것을 다 없앤 제로의 상황이었는데, 그 관계자들,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사과문을 쓰고 사과를 하라고 된 거예요. 그때 제가 ‘아, 씨발 좆까.’라고 하면서 무시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어리고 기존 힙합 래퍼들을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너무 당황스러웠던 거죠. ‘내가 생각하는 힙합은 이게 아니었는데. 불만이 있으면 랩으로 하지.’라는 생각이었어요. 저는 타블로 씨에게 디스곡을 던지고 곡을 들었다는 감이 딱 오자마자 반격곡을 만들려고 비트를 받았었어요. (웃음) 저의 힙합의 방식이었어요. ‘분명히 타블로는 반격 디스를 할 거다. 난 그걸 이기기 위해서 반격곡에 타블로가 할만한 말들을 대략 생각해서 미리 써놔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비트를 받아놓은 상태였는데, 그냥 대화를 통해서 플랫하게 정리가 됐죠. 거기서 그렇게 하고 끝났으면 또 모르는데, 오히려 사과문 써라, 전화로 ‘니가 이러면 누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라는 식으로 말을 듣고…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었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게 어떻게 힙합이지? 힙합이 어떻게 이렇게 사고방식이 돌아갈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었어요. 나름 충격이었어요. 또, 제가 어릴 적에 너무 좋아하고 들어왔던 뮤지션들의 외압으로 그런 거라서 저의 억울함은 더 가중될 수밖에 없고 그랬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끝났고, 한가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살해 협박을 받은 적이 없어요. 네이버에 JJK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살해 협박이라고 나오는데…






LE: 사실 그 루머에 대한 질문을 바로 드리려고 했는데… (웃음)


저는 살해 협박을 받은 적이 없고, 그냥 제가 제 동료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전화 왔었는데 이렇게 말하더라.’라고 토로했는데, 그게 와전돼서 그렇게 루머로 퍼지게 된 것 같아요. 살해 협박을 받았으면 전 신고를 했겠죠. (웃음) 아무튼 그 해프닝은 타블로 씨와 상관없이 억울함이 많아요. 제가 디스를 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게 정리되고 난 후의 처리가 제가 생각했을 때는 너무 억울했어요. 그래서 ‘아, 한국힙합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그래서 ‘이건 내가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내가 여기에 녹아드는 게 더 현명한 일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힙합은 그때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있는 그대로를 모두 솔직하게 얘기하고, 배틀을 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상대방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다 꼬집어서 아예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파멸시키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건 준비가 안 됐던 것 같아요. 그 수준은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것 같고요. 인제야 뭔가 ‘컨트롤 대란’ 같은 게 있으면서 가능한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당시에 디스는 ‘아, 씨발 이건 좀 아니지 않냐?’라고 하면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분위기였어요. 실제로 제가 한 일에 대해서 사고를 당한 것보다 훗날에 제가 사과문을 썼다는 걸로 입은 피해가 더 커요. 아무튼, 저는 지금 타블로 씨에게 아무 감정도 없고, 이건 너무 옛날 일이고, 이 일에 대해서 저에게 욕을 할 필요도 없고, 이걸로 타블로 씨에게 이랬나요, 저랬나요 할 필요도 전혀 없고, 타블로 씨도 모든 일이 다 끝나서 행복한 일을 꿈꾸고 계실 거고, 저 또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이건 그냥 한국힙합 역사의 사소한 해프닝일 뿐이라는 것!






LE: 깔끔한데요? (웃음) 이제 팔로알토 씨에 관한 이야기를 할 텐데요. 얼마 전 힙합플레이야 라디오 <수요일밤>에서 팔로알토 씨가 JJK 씨를 샤라웃하셨었는데, 혹시 보셨나요?


다시 재방할 때? 다시보기라고 하나요? 그때 봤어요.






LE : 지금은 좋게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뭐, 그 당시 일이 이제는 워낙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요.


네. 제가 생각하기에는 팔로알토 형 입장에서는 뭔가… 좋게 지내면서도 마냥 완전히 풀리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해요. 왜냐하면, 저는 디스를 한 입장이고, 그 형은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아무리 괜찮아졌다 해도 마냥 그럴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안 해요. 확실한 건 그때 당시에 제가 나름대로 억울했던 일들이 있었고, 사연들이 있었고, 저 나름대로는 정당하다는 생각 아래 디스를 했는데… 뭐랄까, 그런 거죠. 타블로 씨가 그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것처럼 그 형이 그때 저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것 가지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린 행동이고,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과거를 생각했을 때 제 시점에서 팔로알토 형한테는 ‘나를 싫어한다는 거예요?’라는 느낌이 강했고, 타블로 씨한테는 ‘난 너 싫어요.’ 이런 느낌이 강했던 거 같아요. 이런 저 혼자만의 차이가 있었는데, 표현하면서 더 세진 것도 있고 해서 팔로알토 형한테는 확실히 어린 마음이 컸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느꼈어요.


그래서 제 단독 공연이었던 ‘비공식적 기념일’ 때도 공연 도중에 ‘팔로알토 형 미안해요. 죄송해요.’라고 말을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 뒤로 디스하는 라인이 있는 곡은 공연 때 안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한 번도 그런 곡들은 공연한 적이 없어요. 근데 그 날 ”Make The Way"이란 곡을 하는데, 한동안 까먹고 지내다가 생각해보니 여기에 팔로알토 형을 까는 라인이 있는 거예요. 사실 팔로알토 형을 그 일이 있고 나서 실제로 만났는데, ‘아, 디스했었죠.’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악수하면서 ‘아, 근데 저는 (그 곡에서) 형을 디스한 게 아니라 ‘저를 디스한 건가요?’라고 물어본 거였는데…’라고 말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팔로알토 형이 ‘아~ 아니잖아요. 디스했잖아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때 ‘내가 디스를 했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 생각은 즉 제가 어릴 적에 가볍게 행동했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과해야죠. 무게가 가벼운 말을 제 가사로 옮긴 거니까요. 근데 그 곡은 저에게 너무 상징적인 곡이라서 라이브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라인에 딱 ‘아~ 팔로알토 형 미안, 죄송해요~’하고 다시 라이브를 했죠.




그리고 [도착]의 “가시길”이라는 곡의 메시지 자체가 성경 말씀인 ‘먼저 화해하고, 먼저 용서하라.’인데, 이게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고, 내가 잘못한 일이든, 남이 잘못한 일이든 먼저 화해하는 게 자존심이 너무 상하니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뉘앙스가 있는 곡이었어요. 근데 그 내용이 정확히 팔로알토 형한테 적용되는 가사였어요.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공식적으로 팔로알토 형한테 ‘그때 일은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안 했던 상황이었어요. 근데 (그 노래를) 꼭 같이 하고 싶었어요. 그 형의 벌스를 따냄으로써 용서받고 싶고, 제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은 입장이었어요. (팔로알토 형과 함께함으로써) 그 곡의 메시지가 완성되는 순간을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화해서 원래는 ‘형, 식사 한번 같이 할 수 있을까요?’라고 했는데, 또 저의 게으름 때문에 식사는 못 했어요. 식사하면서 ‘형, 그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곡같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또 말을 못 한 거예요. 그렇게 계속 작업은 밀리는데 (앨범은) 내긴 내야겠고, 급한 마음에 그래도 뭔가 말을 할 땐 정식으로 해야겠고 해서 급한 마음에 이메일에 약간 그런 뉘앙스를 담아서 보냈고, 수락을 해주셔서 같이 하게 됐죠. 그러고 나서 제 공식 쇼케이스에서 사과를 하게 됐고, 지금 이 인터뷰에서도 공식적으로 남기고 싶은 게 팔로알토 형한테는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디스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팔로알토 형한테는 죄송한 마음이 있죠.






LE : 1집 [비공식적 기록]의 이야기를 이래저래 해봤는데, 그렇게 가볍게 다룬 얘기도 있고, 그 당시에 정말 기분이 나빠서 한 얘기도 있고, 결론적으로 [비공식적 기록]은 그 모든 얘기를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담은 앨범인 것 같아요. 숨기는 것도 없고, 돌려서 얘기도 안 하고, 불특정다수를 공격하는 척하지도 않고요. (JJK: 전혀 없어요.) 지금에 와서 그 앨범이나 그때 당시의 본인을 생각한다면 어땠던 것 같고, 지금은 어떻게 변한 것 같나요?


멋있어요. 저는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그렇게 못해요. 왜냐하면, 책임질 게 너무 많아요. 화지 인터뷰 보니까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디스를 안 한다더라고요. 이거 진짜 멋있는 말인 것 같아요. 잃을 게 있을 때 더 과감히 디스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 정신은 진짜 존나 멋있는 거죠. 그만큼 디스에 무게도 실릴 거고요. 그렇죠? 근데 조금 다른 의미로 저는 이제 진짜 못해요. 왜냐하면, 가정이 있기 때문에… 가정이 있기 때문에 저는 디스를 할 수 없어요. 디스가 벌어지면 제 가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배틀, 디스는 가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금 제가 그런 일을 겪고 난 후에 데뷔하게 된 많은 래퍼가 변화가 일어난 힙합을 경험하면서 ‘씨발, JJK 존나 약해졌네. 존나 빼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이해해요. 근데 제가 처음 앨범을 내고 경험한 일들은 다시 겪기에는 너무 타격이 커요. 저는 그걸 ADV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고, ADV 멤버들은 그냥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실력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선입견이 생기는 것도 너무 싫고요. 그 사건이 저한테는 어마어마했거든요. 그런 것을 ADV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고, 가정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고, 배틀, 디스라는 것은 커리어를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 가정의 미래를 거는 리스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과거의 저처럼 행동할 수가 없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때보다 덜 힙합이거나, 멋이 없어졌다고는 생각 안 해요. 그 대신에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이 생겼거든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때의 JJK는 정말 멋있는 MC였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 ADV, 2006 ~ 2009년 -


LE:네. [비공식적 기록]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쳐보고요. 시간 순서대로 저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2008년이 되어서 ADV를 잠시 탈퇴했다가 다시 돌아가시는데요. 이때쯤 허클베리피 씨도 탈퇴하시고, ADV 자체에 대해 많은 결정을 내리셨다고 들었어요. 예전에는 어리고 막내의 역할이었다면 그때부터 리더의 역할을 하시고 크루를 많이 살리려고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차례가 어떻게 되냐면, 다 같이 ADV였다가 도저히 못 참고 제가 먼저 탈퇴를 하고, 허클베리피 형이 한때 잠깐 이끌었다가 형도 못 참아서 나가겠다고 하고 나갔어요. 나가면서 ‘ADV 그냥 다 빠개버리자. 없애버리자.’라고 하다가 ADV가 없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싶어서 제가 다시 작정하고 들어가서 리더를 맡게 됐어요. 이 순서에요.






LE : 그럼 그 당시의 멤버들은 아까 말씀하셨던 멤버 분들 그대로인 건가요?


아니에요. 한 번 확 갈아엎었어요. 그게 그전부터 저희끼리 ‘우리는 리더가 없다. 리더, 형, 동생이 없고, 너무나 자유롭고 좋은 인간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커리어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역할이 될 수가 없다. 너무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게 우리 단체의 단점이다.’라는 말을 늘 해왔었어요. 근데 그 누구도 ‘그럼 내가 할게.’라고 말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나서자니 좀 오글거리고 그랬어요. 그러던 참에 제가 좀 많은 일을 주도했죠. ‘이런 거 해보자, 저런 거 해보자’ 하다가 너무 답답한 거예요. 너무 게으르고 해서 ‘아, 안 될 것 같다. 나는 ADV를 나가겠다.’라고 해서 나갔어요. 그러고 나서 허클베리피 형이 ‘뭔가 좀 해보자.’라며 하려 했는데, 사실 허클베리피 형은 천성 자체가 책임을 지고 뭔가를 이끌 사람이 안 돼요. 그냥 나만 생각하고 나 좋으면 됐고, 즐겁게 놀고 이런 스타일이라서… 책임을 갖고, 내가 뭔가를 잃어가면서 이끌고, 그런 걸 절대 못 할 사람이에요. 정말 짧은 기간 동안 자기도 나름대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겠지만, 전혀 되지 않는 걸 몸소 겪고 나니까 ‘아, 씨발 안 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허클베리피 형이 내려놓겠다 해서 나오게 될 때 ADV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른 친구들도 있고, 고등학생 때 만났던 동창들, 학교 친구들 등 많을 수 있겠지만, 제 인간관계는 ADV가 전부였어요. 제가 인격 형성을 할 때 늘 같이 있었던 형들이 다 ADV였고, 저의 유일한 집단 같은 거였기 때문에 이게 없어진다는 건 저한텐 인생 자체의 뭔가를 들어낸다는 거였어요. 중간에 제가 잠시 나갔을 때는 제가 ADV가 아니더라도 친밀하게 지낼 수는 있으니까 ‘음악적으로만 공유하지 않으면 돼.’ 약간 이런 위안을 얻으면서 나간 거였는데, ADV라는 이름이 사라진다니까 납득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다시 들어갈 테니까 ADV를 없애지는 말자.’라고 했죠. 그리고 허클베리피 형은 그냥 나가는 거로 했고요. 그래서 NB2 위에 커피빈이었는데, 거기 모여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는 크루를 하자. 그냥 우리끼리 막 재미있게 놀고 그런 거 다 끝내자. 이제부터는 내 말에 복종하고, 복종 안 할 시에는 나를 쫓아내거나 당사자가 나가라. 나는 더 이상 이 밍기적댐을 참을 수가 없다.’라는 식으로 얘기했죠. 그래서 그때 한 번 확 갈아엎고, 음악을 계속 할 멤버와 안 할 멤버가 확 갈렸었어요. 그러면서 뭔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가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공기를 좀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들어온 게 팔드로(8Dro)와 레어텅(Raretongue), 비페이머스(Befamous)라는 프로듀서에요. 그리고 우리가 뭔가 제대로 음악을 하는 집단으로서의 버릇이 아니라 맹탕맹탕 백수처럼 놀다가 음악을 취미로 하는 버릇이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시간을 메꾸기 위해서는 음악을 더 가까이하고, 작업하는 분위기로 전환을 시킬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만든 게 ADV 포트폴리오(ADV Portfolio) 시리즈였어요. 믹스테입. 그걸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자주 만들고, 정말 싸게 판매를 함으로써 음악에 대해서 더 애착을 갖고, 그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도록 하고, 정말 몇 없는 우리 팬들에게도 판매하고, 그로 인해서 성적을 이뤄내서 성과에 대한 보람을 느끼자고 했죠. 그리고 맥이 끊겼던 ADV 잔치를 계속 이어나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포트폴리오로 낸 음악들을 잔치에서 공연으로 보여줌으로써 정말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라도 재미있게 하고, 뭔가 우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계속 해나가자고 하면서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확고한 리더의 자리를 자처하고, 인정을 받게 됨으로써 성격을 확 달리했죠.






LE : ADV는 회의도 자주 하고, 앞서 말씀하신 ADV 포트폴리오라고 해서 음원으로 크루 멤버들의 결과물을 내기도 하고, MT도 가는데요. 이 모든 것들이 그때 JJK 씨가 생각해내신 아이디어와 시스템인 거네요.


네, 맞아요.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






LE : 지금 ADV 멤버는 어떻게 되나요? 전입 전출이 이래저래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웃음)


정확히 현재 멤버는 JJK, 갱자, 건이 형이라고 랩 안 하는 멤버, 레어텅, 루피(Lupi), 리플로우(Reflow), 조이레인(Joyrain), 서출구, 드렙(Drev), 올티(Olltii), 켄드릭스(DJ Kendrixx), 오진석, 팔드로. 이렇게 되네요. 와, 많네.






LE : 최근에 힙합플레이야 게시판에서 ADV 이야기로 시끄러웠었는데요. 페이스북에도 정리해서 써주셨지만, 한 번 더 ADV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분들을 위해서 ADV 대표로서 다시 한마디 더 부탁 드릴게요. ADV가 가지는 어떤 그림이나 방향을 얘기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 뭐라 말해야 할까. ADV는 아무리 제대로 음악을 하자고 해도 기본 속성은 어쩔 수 없이 패밀리쉽이에요. 음악보다 그게 더 앞서있어요. 아무리 우리가 다짐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야, 우리 진짜 잘 돼서 돈 이렇게 벌고 유명해지자.'라는 이야기보다 '야, 나중에 우리 다 결혼해서 각자 자식들 낳으면 우리 사람들 진짜 많겠다. 우리 자식들도 다 ADV하면 다음 세대로 넘어가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편이거든요. 기준 자체가 기존에 한국힙합에 있는 크루들과는 달라요. 저희가 바라는 건 살아남는 거지, 음악적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근데 살아남는 게 물론, 음악을 통해서, 힙합을 통해서 살아남고 싶은 게 궁극적인 목표와 맞닿아있긴 있지만, 굳이 한 가지를 포기하라면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걸 택할 거예요. 그런 속성의 집단이다 보니까 '이게 무슨 힙합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이유에서 진석이가 연기자로 전향한 것도 저희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안 돼요. 근데 힙합답게 멋있고 싶은 거고, 힙합으로 승리하고 싶은 거고, 한국힙합에 기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거예요.






근데 이게 저희를 싫어하시는 분들에게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저는 알아요. 어떡하겠어요. 진짜 뭐, 어떻게 해. 확실한 건 색깔이 많이 달라요. 그동안 음악적 색깔이나 힙합의 색깔이 늘 기존의 것과는 달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달랐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다르고요. 근데 한국힙합은 너무 좁은 거예요. 다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 하이라이트(Hi-Lite Records)에요. 왜? 일리네어 레코즈랑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제일 잘 나가니까요. 그리고 새로 생긴 신생 크루들도 다 그 색깔을 꺼낼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인정한 사람들이 뭔가 기존에 있는 파벌에서 그 파벌이 깨지면 갖고 있는 카드를 재조립하는 거잖아요.






LE : 어떻게 보면 이합집산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성향이 잘되면 이런 성향이 아닌 사람들은 멋 안 나고, 인정 잘 안 되는 분위기고 그래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저희는 저희가 힙합의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희가 하는 랩이 비힙합적이거나 담아내는 이야기 중에 '씨발, 힙합인데 왜 이런 이야기하냐?'라는 말이 나올 법한 건 전혀 없어요. 저희는 그냥 저희가 생각하는 힙합을 늘 표출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ADV가 힙합이 아니다.’라는 말은 좀 아닌 것 같아요. ADV가 실력이 없을 수는 있어요. 'ADV가 랩을 잘 못 해. ADV 걔네들 실력 없어.’ 이럴 수는 있어요. 실제로 ADV에서 나온 앨범이 뭐가 있어요. 정규작으로 나온 거? 정말 몇 개 없거든요. 그 와중에 저랑 앨범 낸 애들이랑 커리어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러니까 'ADV는 JJK 빼면 없어.'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해요. 그 와중에 올티가 언급이 된다는 건 올티가 그만큼 잘하고, 잘해내고 있다는 거에 대한 반증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제가 봤을 때는 ADV는 아직도 증명을 해야 할 입장이지, 뭔가 해내서 평가를 받기엔 너무 어리고 역사만 오래되었을 뿐이지, 신생 크루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비판적인 시선이나 그런 게 타당하지 않다고는 말 안 해요. 못 할 수도 있죠. 그냥 그거예요. 제 크루지만 못하면 저도 욕해요. '아, 씨발 존나 구려. 하지마. 이거 왜 해?' 그렇게도 말해요. 회의를 매주 하니까요. 근데 '안 돼요. 형, 전 이거 진짜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그냥 하라 그래요. 진짜 하고 싶다는데…




그리고 저희는 ADV에 대한 프라이드가 매우 높기 때문에 내가 이걸 냈을 때, ADV라는 이름 자체에 스크래치가 나면 '차라리 내 이름에 스크래치가 나고 말지.' 같은 투사 정신이 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랩을 낸 멤버들이 아닌 멤버들도 다 속상한 거예요. '아, 씨발 ADV가 욕을 먹었어.'라고 하면서요. 하물며 욕을 먹은 음원을 낸 멤버들은 어떻겠느냐고요. 진짜 그 무게가 여타 크루나 레이블이랑은 차원이 달라요. 저희는 진짜 완전 '할복해!'라고 요구만 안 할 뿐이지, 본인이 나서서 '제가 할복을 하겠습니다.' (웃음) 거의 그럴 정도로 ADV에 대한 이름에 애정이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욕을 먹은 순간부터 이미 '이거 보완하자.', '이렇게 더 잘하자.'라고 하면서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욕해준 사람에게는 고마울 정도죠.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해요.






LE : 그래서 그런지, "Family Business" 라이브를 울면서 하신 적도 있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안 울었고요. 멤버들이 울었죠. (웃음) 말씀드렸듯이 무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정작 이끄는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멤버들 입장에서는 그게 어마어마하거든요. 제가 잔치 끝나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Family Business"가 항상 잔치 시리즈의 마지막 곡인데, 할 때마다 다른 멘트로 끝맺음을 지어도 멤버들이 ‘아, 형 "Family Business"는 뭔가 새벽 기도 마치고 나온 기분이에요.'라고 하더라고요. 뭔가 치유되는? 멤버들 입장에서는 그런가 봐요. ‘아, 내가 ADV에 손해를 입혔지만, 그래도 나는 ADV야!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보완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들게 하면서 사기를 돋우는 그런 게 있나 봐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기존에 있는 테두리 밖에 있잖아요. 주로 인정받는 색채와는 완전 다른 힙합을 보여주고 있는 크루기 때문에 그만큼 외곽에서 느껴지는 억울함, ‘아, 씨 왜 우리는 이런 입장이지? 그렇게까지 못하지는 않지 않나?’ 이런 게 분명히 있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저희끼리 똘똘 뭉쳐야만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그래서 "Family Business"라는 노래를 부르면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뭉쳐서 해냈던 성과들이 한 번에 몰려와서 눈물이 나고 그런 거죠. 막 앞에 있는 관객들도 같이 울어요. 예전에 했던 공연에서는 멤버 한 명이 우니까 앞에 있는 애들도 덩달아서 울면서 막… 진짜 감동적인 곡이에요.






LE : 네. ADV 얘기를 조금 해봤는데요. 2008년 당시의 이야기를 좀 했어요. 기록상으로는 2006년에 1집이 나왔고, 2009년에 2집이 나왔는데요. 그 사이에 ADV를 탈퇴하고, 다시 돌아오고 하는 과정도 있지만, JJK 씨 개인의 다른 이야기들은 어떤 게 있었는지 궁금해요.


앞서 있었던 디스에 대한 후처리, '한국힙합의 분위기가 이렇구나.'라고 느낀 부분 때문에 사기를 많이 잃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무슨 앨범이 됐든 슈가하이 뮤직에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가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냥 암담했던 것 같아요. 희망이 별로 없고… 그래서 그냥 간간이 피처링이나 공개곡을 통해서 저 자신을 드러내기는 했었지만, 앨범을 준비하다가 엎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뭔가 좀 더 사회적인 사람이 되면서 클럽의 맛을 보면서 여자를 알게 되고, 여자 꼬시고 다니는 방탕한 인생에 빠지게 됐어요. 그거 때문에 더 게을러졌었죠. 그게 순차적으로 일어났어요. 랩은 좋지만 한국힙합에는 막 정떨어지고,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보람이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동력이 안 생기고, 더 느려지고, 그러는 와중에 형들 따라 클럽 가서 놀게 되고, 여자 꼬시는 거 재미있고 그런 거죠. 그렇게 밤 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한창 그렇게 밤 생활이 재미있어진다 싶을 때 그런 클럽 음악에 대한 영향? '아, 이거 진짜 신 나고 재미있구나. 멋있구나.'라고 느끼면서 [왕처럼, 주인처럼]이라는 앨범 자체가 첫 번째 앨범보다 훨씬 더 타락한 밤 인생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고, 클럽튠에 가까운 성향을 띠게 된 거 같아요.






LE : 좀 전에 간간이 공개곡을 내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시에 "화두"라는 무료 싱글을 발표하셨는데, 굉장히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곡이에요. 그 당시에 이런 곡을 내놓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었나요?


그때 당시에 정권이 한 번 바뀔 때였는데, 뭔가 아니다 싶은 소식들이 너무 많이 들려오는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저는 힙합이라면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MC는 'Move The Crowd'니까. 사람들을 움직이고, 사회적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걸 멋있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약간의 의무 같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근데 그 와중에 그런 소식들이 들려오는데, 정작 제가 정치에 대해서 엄청나게 잘 아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단 말이죠. 그래서 제목이 "화두"에요. 사람들 입에 올라오는 이런 화두들이 문제인데, 중요한 건 이거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화두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려고 제목을 "화두"라고 지은 거라는 거죠. 곡을 들어보면 1절, 2절까지는 화두에 오르는 이슈들을 종합적으로 다 모아서 1절, 2절까지 '이런 게 있어.'라고 얘기해요. 그리고 3절에서는 '근데 유명 사이트들에는 다 연예인들 이야기밖에 없고, 아무도 관심이 없어. 근데 우리가 이거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해요. 그런 구성으로 만든 곡이었죠.






LE: “화두"가 나왔던 그 해 앨범 나왔던 그 해 [D-League]라는 앨범도 나왔었어요. 허클베리피 님, 김낙싸움닭 씨, 데피가(Defiga) 씨, JJK 씨로 멤버가 구성되어서 앨범이 나왔었는데, 그렇게 많이 주목받았던 앨범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지만 [D-League] 앨범에 대한 어느 정도 본인만의 소감이 있을 것 같아요.


프로듀서인 데피가라는 친구는 어릴 적부터 같이 (음악을) 해왔던 친구인데, 그때 음악을 관두고 본격적으로 회사에 다니겠다고 했었어요. 걔가 학력도 좋고, 머리도 좋고, 집안도 좋고, 되게 잘생겼거든요. 엄친아 같은 애예요. <투 올드 힙합 키드>에 나오지 않나요? 거기에 그 친구가 케빈이라고 나와요. 아무튼, 그래서 그만두기 전에 힙합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음악을 접는 것을 기념해서 앨범을 내고 싶어 해서 친구들에게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했고, ‘OK. 하자. 너의 마지막을 우리가 기념해줄게.’ 이렇게 돼서 걔 주위에 친했던 김낙싸움닭이랑 또 다른 친한 친구들이었던 저와 허클베리피 형이 모여서 [D-League]를 하게 된 거예요. 앨범 제목이 [D-League]니까 데피가가 주도하긴 했지만, 사실 행정적인 면에서는 제가 많이 주도했었어요. 그리고 그 후에 [D-League 2]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조금 있었어요. 그때 다들 OK 했었는데, 저는 조금 반대하면서 ‘너는 회사원이지 않냐. 회사원이래서 너무 바쁘고, 안 그래도 저번 앨범 때도 회사 다니면서 하느라 너무 바빠서 제대로 준비도 못 하고 행정적인 면에서 내가 많은 것을 해야 했는데, 네가 만약에 이번에 2를 한다면 그때보다도 더 준비를 못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D의 league’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얘기했었어요. 그렇게 제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멈추게 됐죠.






- [왕처럼 주인처럼] -




LE: 2008년은 여기까지 얘기해보도록 하고요. 이제 2집 앨범 얘기인데요. 2009년에 [왕처럼 주인처럼]이 나왔는데 가사 얘기처럼 실제로 많이 팔렸나요?


제가 낸 앨범 중에서는 그게 CD는 제일 많이 팔렸었어요.






LE: 사실 2009년 그 당시가 힙합 언더그라운드 신이 잘 되던 시기기도 했죠.


잘되던 때였어요. CD가 잘 팔리던 시기인데, 살짝 하락세를 탄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LE: 그때 이 앨범에 ‘왕’, ’주인’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전하’, ‘어명’ 이런 말들을 쓰신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이 나온 건 2011년부터더라고요.


그런 거랑 아무 관련이 없고요. ‘전하’는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부인이랑 그 드라마를 되게 즐겨 봤었어요. ‘전하’라는 단어의 어감이 되게 좋은 거예요. 제가 막 챙김 받는 것 같고, 다 막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고… ‘전하’가 어감이 좋아서 제가 부인한테도 가끔 ‘전하’라고 불려주면 안 되느냐고 그랬어요. 근데 부인은 그런 걸 엄청나게 싫어하거든요. 헛소리하지 말라고. 제가 언제는 트위터에 한번 ‘전하’라는 소리 들어보고 싶다고 올렸는데, ADV를 좋아해 주는 팬들이 ‘‘전하’, ‘전하’.’ 이렇게 된 거예요. 저도 신이 나니까 ‘오냐’ 하며 놀기 시작하다가 그게 자연스럽게 정착이 된 거예요. 그리고 제가 실제로 제가 ADV의 리더이고, ADV 안에서 가진 지분이라고 해야 하나? 영향력이 좀 여타 크루보다 막강할 거예요. 오만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ADV 멤버들의 커리어와 실력이 발전할 수 있게끔 따로 1대1로 만나면서까지 이야기하고 정말 많은 것들을 챙겼거든요. 발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이 정도 타이틀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저 자신도 “베스킨라빈스”의 ‘주상 전하 납시오’같은 구절처럼 앞으로도 많이 써먹으려고요. 아무튼, 2집이랑은 전혀 관계없어요.






LE: 그럼 2집 앨범의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된 건가요? [왕처럼 주인처럼].


그때 당시 한창 ADV가 새로 만들어지기 전까지 약간 패배주의에 찌들어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린 뭘 해도 안될 거야. 하하하.’ 이런 거 있잖아요. ‘난 뭐했어. 뭘 만들었어. 이걸로 될까? 해서 되겠어? 하하하.’ 이런 거죠. 그런 게 농담처럼 퍼져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농담과 언행들 자체가 자연스럽게 패배하는 기운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ADV를 새로 구축하면서 ‘우리 그만하자. 우리는 잘될 거고, 우리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말고 진지하게 우리 잘될 것이고 잘되는 거로 농담하자.’라고 하면서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왕’처럼 대하고,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할 때 그때야 비로소 역사가 바뀌고 나의 인생이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앨범 제목으로 그런 타이틀을 건 거죠. 그래서 [비공식적 기록] 때와 비교하면 뭔가 도전적이고, 사운드가 전체적으로 좀 세고 빵빵한 느낌이에요. 그런 느낌을 많이 넣으려고 하기도 했고요.






LE: 트랙 중에 “웃으면서 듣지마” 인트로에서 ‘나 정말 착한 사람이고, 순한 사람이다. 그리고 평화주의자다.’라고 하시잖아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JJK 씨가 1집에서 음악에 화와 원색적인 내용을 담았던 건 역시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전 늘 억울함이 서려 있었어요. ‘나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왜 나를 자꾸 이렇게 만드느냐.’ 이런 거죠. 저는 랩을 충분히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인정을 못 받는 입장이고 그랬던 거죠. 그런 것들이 서려 있으니까 난 평화주의자인데, 세상이 날 너무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 거죠. 어떻게 보면 피해망상 같은 게 좀 있었어요. 하지만 확실히 그게 또 원동력이 되어줬고요.






LE: 제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JJK 씨 음악을 전체적으로 다시 쭉 들어 봤는데요. 개인적으로 [왕처럼 주인처럼] 같은 경우, 다른 앨범들에 비해서 퀄리티가 비교적 좀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왕처럼 주인처럼]이요?






LE: [비공식적 기록]에서 보여준 로우함은 줄고, 그렇다고 [도착]에서 보여준 철학적인 면도 없고 애매한 거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근데 그런 게 저에게는 자랑거리에요. 그때 제 인생이 정말 딱 애매한 때였거든요. 클럽을 무척 좋아했지만, 저 자신이 클럽이나 여자를 꼬시는 게 잘 맞는 사람은 또 아니거든요. 저의 화가 그런 쪽으로 분출되면서 음악적으로도 그전에 듣던 음악보다 좀 더 클럽튠 쪽의 음악을 좋아하게 됐어요. 사실 그걸 잘할 사람이 아닌데, 그걸 더 원하고 그 사운드를 잘하고 싶어지면서 저의 음악과 랩 스타일도 거기에 맞춰서 더 어중간해지면서 과도기에 있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앨범도, 음악도, 제가 하는 이야기도 모든 게 다 어색해졌죠. 애매모호하고 확실한 방향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과도기처럼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제가 그랬던 걸 왜 좋아하냐면, 어떻게 보면 제가 제 인생을 솔직하게 제 음악에 담아낸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음악인이 정말 음악을 한다면 음악이 계속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음악인이 정말 변함없는 삶을 살지 않는 한 말이죠. 저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제 인생을 각 앨범에 다 담아냈거든요. 20 대 초중반, 중후반, 그때마다 제 인생의 변화가 각 앨범에 다 들어가 있어요. 들어보면 그때 당시에 제가 관심 있었던 것, 그때 제가 들었던 것, 그때 제가 하고 싶었던 거, 그때 제가 싫었던 거, 좋았던 거 다 들어가 있어요. 물론, [왕처럼 주인처럼]만 들어보면 ‘아, JJK 랩 못하네!’라고 할 수도 있긴 해요.




최근에 저를 알고 ‘처음부터 한번 들어보자.’ 했던 분들은 제 인생을 같이 걸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 인생의 분위기를 같이 걷고 온 거죠. 그러니까 저는 그게 자랑스럽죠. 그리고 심지어 그 앨범을 높게 사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게 뭐, 저로서는 그때 당시 비판도 많이 들었고, 저 자신도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저의 과도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의 초점과 맞을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는 거죠. 좀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 그 앨범이 제가 지금까지 낸 모든 앨범 중에 가장 많이 투자한 앨범이에요. 사운드며, 곡비며, 가장 많이 투자한 앨범이에요. 그렇게 금전적으로 많이 투자한 앨범인데, 음악적인 비판은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이기도 하죠. 되게 아이러니한 앨범이에요.






- [재], 영화, 결혼 -




LE: 2010년에는 [재]가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왕처럼 주인처럼]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앨범인데요. 저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방금 JJK 씨가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했어요. JJK 씨는 앨범마다 당시에 처해있던 본인의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고, [재]가 나올 때도 JJK 씨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어요.


그렇죠.






LE: [재]를 낼 당시, 개인적인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린 시절과 방탕하게 지냈던 시절에 있었던 수많은 억울함과 외로움, 억하심정, 안 좋은 피해망상 그런 화들이 초창기에 랩으로 분출된 거 같아요. [왕처럼 주인처럼] 때는 놀음으로 화를 분출하던 때였고요. (그런 놀음이) [왕처럼 주인처럼]이 나온 뒤에도 계속 상승세였어요. 진짜 말도 안 되게 피크를 많이 쳤거든요. 정말 동물이었어요. 진짜 그냥 동물. 정말 안 좋은 사람이었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화가 누그러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때가 있었어요. 그래프로 생각해서 이제 음악을 낸다면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수많은 억울함과 화를 많이 진압하고 나서 남은 재 같은 게 나오지 않을까 해서 앨범 제목을 [재]라고 지은 거예요. 어느 정도 (화가) 진정이 되고 쓴 가사가 담긴 앨범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때 [비공식적 기록] 때의 작업관으로 마음가짐이 돌아갔었는데, [비공식적 기록] 때보다 훨씬 더 진정된 상태에서 차분하게 했죠. 시대적으로 봤을 때, 제가 첫 앨범을 내고, 두 번째 앨범을 냈을 때는 믹스테입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첫 앨범과 두 번째 앨범이 거의 믹스테입 같은 작품들이었어요. 작업할 때의 마음가짐이나 작업하는 방식들이나 이런 것들이 믹스테입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앨범은 그렇다 쳐도 첫 번째 앨범은 진짜 볼 것도 없이 ‘쌩’ 믹스테입이었죠. 그래서 만약에 커리어를 다시 시작한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재]를 첫 정규 앨범으로 할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또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해요. 1집, 2집, 정규, EP 그런 거 다 상관하지 않고 그냥 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재]가 뭔가 처음으로 프로답게 작업했던 앨범인 것 같아요.






LE: 저도 [재]를 들으면서 비슷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전 앨범이랑 [재] 이후의 앨범이 너무 다르잖아요. 정규 앨범이라는 말을 하나의 앨범에 일관된 느낌으로 정리된 형식으로 담아낸 결과물이라고 정의하면 아마 JJK 씨의 커리어에서 첫 정규 앨범은 [재]이지 않나 싶어요. 이야기를 더 이어가 보면, [재] 수록곡 중에 “사브라”라는 곡이 있는데, 정대건 감독님이 동명의 타이틀의 영화를 졸업 작품으로 만드셨어요. 혹시 보셨나요?


아니요. 못 봤어요. (전원 웃음) 당당히 못 봤어요.






LE: 그럼 정대건 감독님의 또 다른 영화인 <투 올드 힙합 키드>가 2011년에 나왔고, 본인이 직접 출연하셨는데요. 상도 받고, 영화 자체의 반응도 괜찮았는데, 처음에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 출연을 망설이거나 그러지는 않으셨나요?


그게 어떤 영화인지에 대해서 감을 잘 못 잡았었어요. 그냥 처음에는 그 친구가 ‘이런 거 할 건데, 출연해줬으면 좋겠어. 인터뷰도 많이 따고 그러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되게 비중이 많은 줄 알았어요. ‘그래. 재밌지.’라고 하면서 출연했는데, 생각만큼 비중이 크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약간 허클베리피 형과 지조를 좀 띄우기 위한 영상? (전원 웃음)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그냥 뚝심 있는 힙합을 대변하는 그런 입장이고, 그 두 명을 좀 더 조명한 것 같은데, 아무튼 재미있었어요. 사실 영화 속 영상들은 영화가 나왔을 시기보다 한참 옛날이에요. 그래서 공개되었을 때는 제 상황이 좀 달랐죠. 그래도 저희 입장에서는 의미가 깊죠. 옛날 장면들도 되게 많이 나오고 하니까요.






LE: 영화와 함께 영화제 공연도 몇 번 하셨잖아요. 혹시 그때 특별히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 건 없나요?


지방에서 하는 독립영화제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아, 제천독립영화제였어요. 비가 엄청 오는 거예요. 그래도 그냥 했어요. 되게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LE: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하셨을 때도 비가 엄청 오지 않았나요?


네. 이상하게 하는 곳마다 비가 오더라고요. <투 올드 힙합 키드>는 비 때문에… (전원 웃음)






LE: 감독님하고는 ADV 초, 굉장히 예전부터 알고 계셨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ADV는 아니었지만… 영화 보면 알겠지만 TRF라는 크루에 있었는데, ADV와 되게 친밀한 크루였어요.






LE: [사브라] 엔딩 크레딧에도 Special Thanks로 ADV가 나오잖아요.


아, 진짜요? 이런… (웃음) 그걸 내가 놓치다니. 되게 섭섭했겠다.






LE: 손 모양도 같이 나오고…


그래요? 미안해라. 바로 보러 갔어야 했는데, 그때 경황이 없었어요. 레슨이랑 겹치고 그랬거든요. 근데 시나리오라 그러죠? 그건 봤어요. 처음에 연기자 섭외할 때 ADV 쪽으로도 왔었거든요. 근데 극 중에 ADV가 나오나요?






LE: 올티가 한 3초? (웃음)


영화에 ADV라는 이름이 나오나요?






LE: 이름이 나오지는…


아, 원래는 나왔거든요. 시나리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주인공 중의 한 명이 ADV를 만나서 ‘이 형들 길거리에서 짱이야.’라고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고, 선망하는 그런 그림으로 나와서 그런 거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했는데, 연기자가 마땅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올티랑 진석이가 물망에 있었거든요. 조금 아깝죠. 근데 올티랑 진석이가 하기에는 애들이 너무 귀티 나게 생겨서 탈락했었어요.






LE: 그래서 앤덥(Andup) 씨가… (웃음)


어, 그런데 앤덥(Andup) 연기 엄청 잘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앤덥… 그런 쪽으로 재능 있을 줄 몰랐어요.






LE: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해봤는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조금 뜬금없는 전개 같지만, (웃음) 지금의 아내분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2010년 10월 16일 날 처음 만났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홍대 놀이터에서 싸이퍼가 있었어요. 싸이퍼가 있었는데 대규모의 싸이퍼였어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공연이 끝나고 난 후였나? 이센스(E-Sens)랑 스윙스(Swings)부터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렸었어요. 갑자기 길거리 싸이퍼를 하겠다고. 그때 또, 웜맨 형이었나? 갑자기 스피커를 어디서 대여해서 스피커까지 깔고, 리미(Rimi)가 공연하고 그랬어요. 아마 웜맨 형의 홍보 전략도 겸해져 있었겠죠? (웃음) 아무튼 프리스타일을 하는 싸이퍼가 생겼는데, 기존 싸이퍼보다 당연히 더 인원이 많았어요. 그때 지금 ADV 멤버인 건이 형이 제 부인이랑 같이 싸이퍼를 구경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가서 ‘왜 건이 형이랑 놀아요?’라고 했었죠. 제가 그날까지도 클럽 좋아하고, 막 여자 꼬시는 거 좋아하는 이런 스타일이었어요. 그러다가 부인을 만나고 그날도 ‘우리 같이 놀아요. 같이 클럽 가서 놀아요.’ 막 이렇게 꼬드긴 거예요. ‘같이 놀자. 같이 놀아요.’라고 했더니 같이 안 놀겠대요. 부인이 별로 놀고 싶지 않았고, 또 부인이 잠이 너무 많아서 밤에 못 놀아요. 그래서 ‘싫다. 그냥 가겠다.’라고 해서 ‘그래요.’라고 하고 그냥 보냈어요. 근데 또, 부인 입장에서는 그냥 보낸 게 자존심이 좀 상했던 거야. ‘아니, 전화번호도 안 딴단 말이야?’ 이러면서 자존심이 상했대요. 그렇게 그냥 보내고 그 날 클럽 가서 논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이리저리 추적해 보니까 그날이 2010년 10월 16일이었어요. 부인을 만난 날과 제가 놀음이 끝난 날이 정확히 일치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저의 모든 놀음이 막이 내리고, 바로 그 다음 날에 건이 형의 트위터로 가서 팔로잉, 팔로워 목록을 보니까 딱 봐도 그냥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을 걸고, DM을 주고받고 하고, 따로 만나면서 그렇게 시작됐어요. 그다음에는 불이 확 붙어서… (웃음)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LE: 혹시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떤 일까지는 조금 그렇고, 그냥 되게 현명하고 지혜로워요. 저보다 훨씬 더 빠릿빠릿하고, 미모는 진짜 말할 것도 없고요. 그냥 말도 안 되는 미모가…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연예인이랑 같이 사는 느낌을 확실히 알아요. 출근하려고 청바지를 입으면 나만 볼 수 있는, 내가 남편이래서 볼 수 있는 진짜 말도 안 되는…






LE: 되게 표정이… (전원 웃음)


아무튼 진짜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요. 성격이 되게 빼는 것 없고, 귀엽고 앙증맞은 거 별로 안 좋아해요. 호쾌하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비공식적 기록] 때의 저의 색깔과 되게 맞닿아있어요. (전원 웃음) ADV 멤버들한테도 진짜 직설적으로, 저보다 더 세게 ‘야, 이번 거 병신이야.’, ‘구려. 하지마.’라고 할 정도예요. 완전 직설적이고, 성격이 센 편이에요. 그런데 그 와중에 그게 자기 보호차원에서 센 거고, 내면은 저만 볼 수 있는 그런 소프트하고 아름답고 귀여운 것들이 있어요. 무엇보다 지혜로워요. 배려심이 강하고요. 외모와 그런 연애 심리보다도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그 배려심과 독립성이에요. 저는 그냥 느릿느릿하고, 여유 많고, 랩만 하는 바보 약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부인이 정말 지혜로워요.






LE: ‘Real Lady’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그렇죠.






LE: 힙합은 좋아하는 편이신가요?


네, 좋아해요. 그렇다고 딥하고 매니악하게 듣는 건 아니지만, 힙합 자체를 좋아하고, 한국힙합 팬이에요. 한국힙합의 흐름에 대해서 같이 걱정하고 그래요. 그런 얘기를 같이 하다 보면 막 세게 ‘한국힙합 망했네.’ 이러기도 해요. (웃음) 그러면서 같이 걱정하고, 막 답답해하기도 해요. 또, 여자다 보니까 들리는 소문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빠르거든요. 그래서 뭐 하나 들었다 하면 ‘아 이거 괜찮은 건가?’ 이러고… 제가 살아가는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한국힙합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LE: 오그라들 수도 있고, 없으실 수도 있지만, 혹시 평소에 하지 못했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그런 거 없어요. 전 맨날 전해요.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또, 제 개인적으로도 전해요. 그렇게 해도 부인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더 얘기해줘.’라고 해요. 진짜 제가 늘 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더하고 싶은 말?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임신했으니까 아기가 생기니까 본인의 여자로서의 매력 같은 것에 대해서 의심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거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그걸 꼭 말해주고 싶어요. 너무나 아름답거든요. 임신해서 더 아름답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자체로도 너무 아름다워요. 제가 남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남자가 봐도 예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건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정말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또, 부인도 저를 많이 좋아하는지라 부인 입장에서는 제가 여자한테 엄청나게 인기 많고, 나가면 여자가 엄청 꼬이고, 저를 꼬실 것 같고 그런 가봐요.






LE: 그런 이야기가 다 “별걱정”에서…


네. 그게 다 “별걱정”에서 한 얘기인데,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니까 정말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돼요. (전원 웃음) ADV에는 올티랑 진석이 같은 정말 멋있는 애들이 알아서 주변에서 빛나주고 있기 때문에 그 빛을 뚫고 저한테 올 가능성은 1%도 없어요. 전혀 걱정 안 해도 되고, 제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해요.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LE: 좀 전에 부인분을 만나시면서 그 놀음이 끝났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진짜 거짓말처럼 확 끝났어요.






- [도착] -




LE: 사실 [재] 이후에 나온 [도착]이라는 앨범이 그 전에 나왔던 앨범들과 많이 다르잖아요. 아무래도 부인분을 만나신 게 영향이 컸던 건가요?


그렇죠. 엄청나게 크죠. [도착]이라는 앨범의 시각 자체가 특정 영역에 도착한 후에 뒤돌아 보는 이야기들이에요. ‘뒤돌아보니까 세상이 이랬더라. 뒤돌아보니까 이런 것들이었더라.’ 약간 이런 과거형의 앨범인데, 그렇게 된 게 부인을 만나고 온전히 다 내려놓게 되고 나서인 거죠. 놀음이 아예 끝이 나니까 그전의 내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시각에서 이야기하는 앨범이에요.






LE: 이제 [도착]에 대한 얘기를 해볼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도착]이라는 앨범 자체가 JJK 씨 커리어에 있어서 굉장한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제가 본격적으로 팬이 되고, 완전히 주목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개인한테 의미가 있는 가사가 타인의 공감대를 건드린다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힘든 일인데, 이 앨범에서는 그런 부분을 뛰어나게 해냈다고 생각하는데요. 본인은 [도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너무 좋아하는 앨범이에요. 단연코 제가 냈던 앨범 중에 가장 퀄리티가 높은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비트 초이스부터 제가 했던 랩들, 랩들이 담은 가사와 또 단순히 비트들을 받고 거기에 랩을 한다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어떤 편곡력, 모든 면에서 제가 냈던 앨범 중에 완성도를 따지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해요. 어떤 곡이든 다 의미가 있고요.






LE: 그만큼 고민한 흔적도 많이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한 번에 이해되기 힘든 그런 표현 방법도 쓰기도 하셨잖아요. 특히 초반부에 그런 게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의도를 담고 만드신 건가요?


초반부요? 앨범의 초반부? 1번 트랙을 뜻하는 게 아니라요?






LE: 네. 앞부분들. “혀를 더 가볍게”, “식탁” 이런 트랙들이죠.


아, 네. 주제가 이어지면서 흐름을 만드는 스토리 형식의 앨범은 아니에요. 각 트랙을 파편적으로 만들게 됐는데, 앨범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반적으로 웅장함이라고 해야 하나? 현악이 더 강력하게 들어가고, 그런 게 주가 되는 사운드를 초반에 더 배치한 것이고, 그래서 그래프로 치면 초반에 높게 가다가 중간에 비워진 채로 가다가 후반에 채워지는 형식을 그리려고 했어요. 초반부가 담은 메시지는… 일단 1번 트랙인 “도착”은 그냥 제 개인적인 얘기라고 보시면 돼요. “상”부터 시작해서 “혀를 더 가볍게”를 통해서는 인간 자체의 특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인간 자체를 꿰뚫는 본질, ‘그래서 본질이 뭐냐?’에 대해서 많이 쓰고 싶었어요. “상” 같은 경우는 '오만함'이 키워드거든요. “상”은 인간이 인류로서 해냈을 때 그것을 기념해서 상을 세우는데, 그게 오만함의 상징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한 거고요. 그래서 가사 내용 내내 ‘우리는 정말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나아가려고 하는 건가. 우리가 더 나아가고, 더 해내고, 더 많은 걸 누릴수록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게 다 의미가 없다.’ 이런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상”이라는 곡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되게 없는 곡이지만, 제가 쓴 가사 중에 탑으로 생각하는 가사에요. ”혀를 더 가볍게” 같은 경우는 인간의 거짓에 대해서, 거짓된 행동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도착]이라는 앨범을 내기 전에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그 거짓말을 할 때 어떤 심리였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심리를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빗대어서 풀어나가죠.






LE: [도착]을 내기 전에 본인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이런 철학적인 부분에 굉장히 몰두하셨던 것 같아요.


네. 맞아요.






LE: 그래프로 치면 내려가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는데, 초반부가 지나고 나면 중반부에 “Give & Take”이 나오는데요. 지코(Zico) 씨 피처링은 나름 전략적이었던 건가요? 어떻게 같이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지코라는 래퍼는 원래 알고 있었어요. 아이돌이기도 한데, 랩도 되게 잘한다고 알고 있었어요. 근데 믹스테입 같은 것도 내서 되게 인기도 좋고, 실력도 되게 좋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제대로 들어보지는 못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우연히 제가 찾아서 듣게 된 거죠. 얼마나 잘하나 해서요. 워낙 자자하니까요. 근데 진짜 잘하는 거예요. 정말 잘하고, 젊은 감각으로 잘해서 ‘와 진짜 멋있다.’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피처링을 섭외할 때 약간 저랑 배틀을 하듯이 해요. 누굴 섭외한고 하면 ‘이 주제로 나보다 이 사람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비교심리가 있어요. 배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Give & Take” 비트에서 이 간지의 랩을 하면 지코보다 잘할 수 있을까?’, ‘지코는 젊은 감각의 대표주자니까 나와 같은 곡에 올라섰을 때 내가 뒤지지 않고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제가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 시간을 거쳐온 래퍼니까요. 그런 여러 가지 기준에 합당하니까 한번 컨택해보자 했죠. 근데 아이돌이니까 컨택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근데 그때 마침 인디펜던트 레코즈(Independent Records)가 한창이었던 때인데,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라는 인디펜던트 레코즈의 두 번째 쇼케이스 공연인가? 그 공연의 게스트가 지코였어요. 그래서 마침 제가 바스코(Vasco) 형이랑 인연이 있고 하니까 놀러 갔더니 대기실에 있는 거예요. 사실 지코에게 물어보려고 간 것도 있어요. 그때 대기실 안에서 싸이퍼도 했는데, 프리스타일도 곧잘 잘하는 거예요. ‘와, 얘는 다 잘하는구나. 요즘 애들은 다 이 정도구나.’라고 느끼면서 ‘저는 JJK라고 하고, 이번 앨범에 피처링을 한번 묻고 싶은데, 회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회사가 이런 것에 있어서 자유로운가?’라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회사에서는 개인 활동, 언더그라운드 활동에 대해서는 터치 안 한다더라고요. 그리고 어렸을 때 제 음악을 몇 번 들었었대요. JJK라는 건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얘기가 좀 진행되겠구나 싶었죠. 아예 생판 모르면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고맙다. 같이 한번 했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참여하게 됐는데, 실제로 랩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되게 오래 걸렸어요. 그리고 저도 벌스가 하나밖에 안 써진 상태였어요. 첫 번째 벌스 밖에 안 써진 상태였죠. 저는 “Give & Take”의 비트를 해석할 때 약간 느슨한 곡으로 해석했었어요. 그냥 평범하게 천천히 누르는 그런 바이브로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천천히 하는 것을 중점을 뒀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 지코가 랩을 했는데 완전히 쪼개놓은 거예요. (전원 웃음) 물론, 쪼개놓는 것도 당연히 방법 중 하나지만, 저는 당연히 이 곡이 아까의 그런 바이브가 될 줄 알았던 거죠. 어쩌면 제가 그 바이브를 이해를 잘 못 한 것일 수도 있어요. 시대가 아예 다른 래퍼니까요. 완전히 쪼개놓으니까 완전 잘하긴 했는데, 제가 생각한 곡의 방향과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저는 그래프가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가길 기대했는데, 갑자기 1절이 끝나고 (지코가) 확 띄어놓은 거예요. 저는 3절도 써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원래는 3절도 느슨하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조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3절까지 들을 이유가 없는 곡이 될 것 같은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3절에서는 저도 완전히 빠르게 랩을 하는, 막 리듬을 쪼개는 그런 리듬을 구사해야 했었죠. 전략이라기보다는 젊은 래퍼를 대표하는 래퍼와 한번 비교당해보고 싶었어요. 그 결과에 대해서는 굳이 논할 필요는 없는 거 같고, 저의 개인적인 경쟁심리 같은 것이에요. MC로서의 자존심 약간 이런 거? (웃음)






LE: 그럼 번외로 지코 씨가 굉장한 팬덤을 보유하고 계시잖아요. 팬덤의 덕도 좀 보셨나요?


그게 웃긴 게 아이돌이라고 알고 있었고,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뭐, 유명하겠지. 아이돌이니까 TV에 나오고 그러겠지.’라고만 생각했었어요. 저는 근데 TV에서 한 번도 지코를 본적이 없거든요. (웃음) 그래서 ‘유명한가?’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언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파워구나.’라고 느꼈느냐면, 저작권 협회에 제가 곡을 등록하는데, 팬들이 이미 지코가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저를 팔로우하기 시작한 거예요. ‘JJK가 누구지? 지코가 피처링했다는데.’라고 하면서 저를 팔로우하고, 갑자기 해외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이게 무슨 일이지?’하고 보니까 계정에 블락비(Block B)의 팬클럽인 ‘BBC’가 다 붙어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스케일의 아이돌이었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러고 나서 어느 날 TV를 봤는데, 지코가 랩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좀 느꼈죠.






LE: 피처링 얘기를 더 해보면, 아까 잠깐 얘기가 나왔던 “가시길”에서는 팔로알토 씨가 함께하셨는데요. 더불어 바스코, 팔로알토, 제리케이(Jerry.K), 딥플로우 같은 아티스트 분들과 함께 작업하신 게 왠지 동질감에서 비롯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대표, 많은 동생의 형, 베테랑 MC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까요? 이제는 마냥 치기 어리고 패기만 넘치는 분들이 아니잖아요. 뭔가 그런 분들과 통하는 구석이 많을 것 같아요.


그렇게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러네요. 확실히 동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느낌이 있긴 하네요. 근데 제가 피처링을 요청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음악적으로 제가 뽑고자 하는 간지가 일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이 주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해요. 제가 선정한 주제 안에서 같은 이야기는 할 수 있되, 저와는 다른 시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작사력을 가졌는지가 저한테는 중요한 편이에요. 지코를 선택했던 이유도 “Give & Take”의 비트가 [도착] 앨범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세련된 그때 당시에 유행하는 스타일의 비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최신의 플로우를 보여줄 수 있는 최신의 래퍼가 이런 주제에 이런 가사를 랩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선택한 거예요. 그런 것처럼 딥플로우가 “종의 마지막”에 선정된 것도 가 딥플로우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딥플로우를 선정한 것은 제가 후렴구의 사운드를 저의 힘만으로는 뽑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어요. 후렴구는 딥플로우 같은 굵은 톤의 래퍼가 했으면 좋겠다 싶었던 거죠. 그리고 가사도 그 주제에 맞게 뽑을 수 있느냐까지 딥플로우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딥플로우를 선정한 거예요. 선정이라고 하니까 뭔가 제가 고르는 느낌인데, 그런 건 아니고요. 또, 제리케이 형이 “Life X Times”에 선정된 것도 막 사직서를 내고, 여러 경험을 한 게 가장 ‘인생’을 산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30대에 들어선 어른의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때 제리케이 형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서 같이 하자고 했던 거죠. 늘 그랬어요. “악당”도 힙합에서 악당이라면 바스코 형이 좋은 의미에서 가장 악당 같았고, ‘내가 악당이야. 씨발 뭐 어쩌라고.’ 이런 느낌 있잖아요. 바스코 형이 뭔가 악에 받친, 그렇다고 소리 지르는, 락 스피릿 그런 게 아니라 딱 응집된 화라는 게 있잖아요. 꿍얼꿍얼하게 이 꽉 물고 있는 느낌이 바스코 형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늘 그렇게 주제의 색깔에 맞는 MC를 뽑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LE: 보면 커리어 내내 JJK 씨의 앨범에 피처링 했던 아티스트들을 보면 중구난방이더라고요. 이노베이터(Innovator), 스윙스, 도끼(Dok2), 각나그네, UMC 등등이 있는데, JJK 씨는 그냥 곡에 어울릴 법한 사람을 뽑으신 거네요.


그렇죠. 최대한 저의 기준에 맞게 한 거죠. 그게 파벌이 없는 저의 장점이기도 해요. 완전 외곽에 있으니까 제 입장에서는 누구랑 누구랑 가깝고 이런 게 없단 말이에요. 누가 잘 나가든 못 나가든 다 똑같은 선상에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중에서 제일 제 노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컨택하는 거죠.






LE: 혹시 피처링 섭외하다가 ‘JJK는 되게 세고, 남을 되게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적이 래퍼고 하니까 어느 쪽이랑 척을 질 것 같아서 이번 피처링은 못하겠다.’라고 얘기하시면서 난색을 보인 분도 계시나요?


그런 사람은 없었죠.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걸 저한테 말할 수는 없죠. ‘넌 너무 세. 이미지상 안 돼.’ 이렇게 얘기는 다들 못하니까요. 그런 건 없었고요. 피처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은근히 제가 ADV 멤버들을 피처링에 잘 안 써요. 그 부분이 저의 피쳐링의 기준을 잘 알려드릴 수 있는 부분이에요. 같은 ADV라 해도 보이스나 삶의 방식이 주제랑 안 맞는다고 하면 거의 안 쓰는 편이에요. 그게 되게 웃겨요. 사람들이 저한테 ’ADV, 인맥 힙합이야.’ 이러는데, 인맥이면 제 앨범에 피처링은 다 ADV로 했어야죠. 그런데 ADV 피처링이 거의 없어요. 제가 (리더로서) 이끌어주는 건 힙합, 랩, 음악은 다 삶과 하나니까 음악적으로, 삶 적으로 뿐인 거죠. 제가 커리어적으로 끌어줄 것 같았으면 이 정도로 멈추지 않죠. 하물며 저는 씨잼(C Jamm)을 ADV 멤버들보다 더 샤라웃을 쳤잖아요. 맨날 트위터에 ‘씨잼, 씨잼. 얘는 짱이고, 얘는 잘돼야 하고, 짱이에요.’라고 했거든요. 하물며 아무도 제 곡에 ADV 피처링은 안 할 때 씨잼은 피처링을 했잖아요. 왜냐하면, 씨잼이 그 주제에서 그 리듬 감각을 보여주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똑같아요. ADV도 제가 생각했을 때 색깔이 맞아야만 피처링을 요청하는 거예요. 근데 더 웃긴 건 ADV도 저한테 그런 걸 배워서 자기들끼리도 잘 안 해요. ‘아무리 이 형이랑 친해도 이 형의 삶과 이 곡은 안 맞아.’라고 하면서 안 해요. (웃음) 자기들끼리는 했으면 좋겠는데…






- [도착 후] -




LE: [도착]을 발표하시고 바로 [도착 후]를 발표하셨어요. 후속편이라고 봐야 하는데, [도착 후]를 [도착]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빨리 공개하신 이유는 있나요?


[도착]을 준비할 때 한가지의 색깔의 트랙을 만들기 위해서 몇몇 트랙들을 자르거나, 모아두거나 했던 경우가 되게 많았어요. 비트 같은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고요. 그리고 [도착] 같은 경우에는 제가 철학적, 본질적 접근을 되게 중요시했던 작품이다 보니까 그냥 한 줄을 쓰더라도 [재]나 [비공식적 기록] 같은 경우처럼 시원시원하게 쓰기보다는 앨범의 분위기를 유지해줄 수 있는 알맞은 단어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하면서 썼어요. 그러면서 스킬적으로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되게 오래 걸렸어요. 반면에 모아둔 비트들에는 가사를 쉽게 쉽게 써내려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말 그대로 도착한 후니까요. [도착]은 도착한 시점에서 과거형이었으니까 그렇게 써야만 했지만, [도착 후]는 저에게 그 부담이 없었거든요. 더 삶이 편안해지고, 시원시원해지고, 안정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색채를 표출하는 데에는 작업도 훨씬 더 빨랐고, 모든 면에서 쉬웠죠.






LE: 약간 부틀렉 같은 느낌이네요.


네. 맞아요. 책을 사면 부록으로 작은 거 하나 끼워주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었어요.






LE: [도착 후]는 터치다운 뮤직 그룹(Touchdown Music Group)에서 나왔잖아요. 그 당시 터치다운 뮤직 그룹에 잠시 계셨었는데요. 지금은 ADV 자체가 단단해진 느낌이 들지만, 터치다운 뮤직 그룹과 잠시 같이 한 이후에 다른 계약 관계나 소속 관계를 생각해보셨을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의 계약관계 이런 부분을 물으신 건가요?






LE: 네.


터치다운 뮤직 그룹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그쪽에서 잘 못 해준 것도 전혀 없고, 그냥 제가 불안함이 느껴져서 나오게 되었어요. [비공식적 기록 II]라는 앨범의 타이틀이 저의 인생의 나름 반환점이 될 타이틀이잖아요. [비공식적 기록 II]니까요. 근데 그 앨범을 회사를 통해 나오면 회사에 묶어둬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기에는 제가 불안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장이었던 리오(LEO) 형과 좋게 이야기해서 나오게 된 거예요. 이제 나이도 있고, 이 업계에서의 열기라는 게 있잖아요. JJK라는 이름이 가지는 그 열기가 제가 뭐, 루키도 아니고 하니까 약간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이렇게 느껴지더라고요. [도착] 때부터 되게 심해졌었어요. ‘이제는 있어도 있는 거고, 없어도 없는 거구나. 이제 계속 나 혼자 음악할 운명이구나.’ 이렇게 느꼈었어요. 그래서 그냥 독립적으로 음악을 해야겠다고 하고 나온 게 [비공식적 기록 II]에요. 그래서 발매된 형태나 이런 것도 되게 독립적인 느낌이었던 거죠.






LE: [도착]을 그렇게 느끼셨던 이유 중 하나가 피드백이 양적으로 저조했기 때문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정확한 계기가 있어요. 우선 오히려 제가 원하던 피드백은 많이 받았어요. 저는 트위터나 SNS를 통해서 기존 래퍼들에게 ‘오, 이거 좋다.’, ‘이거 명반이다.’라는 이야기를 [도착]이라는 앨범으로 처음 들었어요. 저는 그전까지 기존 래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늘 억울함이 있었던 거고요. 오히려 안정을 되찾은 후에 그런 피드백이 생겼다는 건 어떻게 보면 좀 아이러니한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힘을 빼고 살아야 해요. (웃음) 아무튼 그래서 피드백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저조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라도 저에게는 감사한 일이었어요. 반면에 힙합플레이야에서 이달의 앨범을 고를 때,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이달에 나온 앨범이 [도착]밖에 없더라고요. 제가 이 정도로 뽑았으면 기존 래퍼들도 많이 인정해줬고, 의미도 깊고 하니까 뽑아주겠구나 싶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앨범이 가벼운 앨범은 아니었지만, 당시 있었던 수많은 가벼운 앨범들 사이에서 [도착]이 문구나 어투 자체가 되게 철학적이었고, 의미가 깊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는 이달의 앨범으로 걸릴 것으로 생각했어요. 근데 [도착]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이달의 앨범이 선정됐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뒷이야기로 들은 거죠. 그때 팔로알토 형과 이보(Evo) 씨가 냈던 [Behind The Scenes]가 이달의 앨범으로 걸렸었어요. 그때 제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선정이 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또 한 번의 너무나 큰 시스템에 대한 슬픔, 억울함으로 저에게 다가왔어요. 왜 이달에 나온 앨범이 다 나오고 나서 선정이 안 되는 건지, 그게 곧 (이 시스템이) 미리 짜인 각본에 의한 게임이라는 거잖아요.






LE: 그리고 심지어 그달에 [Behind The Scenes] 앨범이 나오지도 않았었죠.


그게 이차적 심각함이었죠. (웃음) 그 앨범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대화를 통해서 이달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니까 선정했던 거죠. 이 시스템 자체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하물며 그 앨범이 다음 달에 나오게 되었어요. 저는 정확히 그달에 나왔는데 말이죠. 너무 슬픈 거예요. 제 커리어에서 최고의 퀄리티고, 최고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정말 그 어떤 작품과 견주어도 무게가 덜 나갈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저 나름대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걸고 매번 욕먹었던 커버 아트워크까지, 거금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신경 썼었단 말이에요. 모든 면에 있어서 의도가 안 된 구석이 없었어요. ‘이건 진짜 정말 멋있는 앨범이다, 좋다. 내가 들어도 너무 좋아!’라고 생각하면서 딱 냈는데, 시스템에 의해서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팔로알토 형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필 팔로알토 형이 앨범을 낸 것뿐이에요. 팔로알토 형한테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시스템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팔로알토 형이 심지어 트윗을 했었을 거예요. ‘제가 이달에 앨범이 안 나와서 지난달에 앨범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많은 앨범들에 미안하다. 늦어져서 이렇게 된 게 미안하다.’라는 식의 트윗을 했을 거예요. 그건 솔직히 팔로알토 형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라 시스템이 미안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억울한 거예요. 그 이후로 ‘이젠 내가 뭘 해도 뭐에 선정될 일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워줄 이유도 없고, 내가 뭘 하든 너희가 관심이 있기나 하니? 난 그냥 나 혼자 할게. 나 혼자 열심히 내 작품 할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진짜 보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보람이 안 느껴지고, 저는 제가 랩을 하는 게 한국힙합에 일부분 기여하거나 인정받음으로써 그걸 원동력 삼아서 가는데, 그 순간부터는 그냥 순수하게 저와의 싸움이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고, 내가 그냥 내 삶을 풀어야겠다.’ 싶었고, 그래서 ([비공식적 기록 Ⅱ]는) 더욱 일기처럼 된 거예요. ‘너희가 관심이 있기나 하니? 난 그냥 JJK인데.’ 이러고 다 내려놓았어요.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아이러니하게도… (전원 웃음) 진짜 웃긴 일이에요.






LE: 아이러니하게도 다 내려놓고 나니 한국대중음악상 싱글 부문 후보에 오르고, 리드머 어워즈 싱글, 앨범 후보에도 올랐어요.


웃긴 일이에요. 분명히 그만큼 제 랩도 발전했어요. 인정받을 수 있을 선으로 충분히 더 도약했어요. 근데 거듭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전의 저의 랩이 인정을 못 받을 랩이었다고는 절대 생각 안 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저만의 이야기를, 저만의 방식으로, 힙합의 법칙에서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는 랩을 충분히 뱉어 왔어요. 하지만 판이 좁아서, 시스템이 그래서 제가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뿐이었죠. 그래서 [비공식적 기록 Ⅱ]는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길 포기하고 ‘나는 나 혼자 그냥 도 닦는 노인처럼 이러다 늙어 죽겠지.’ 약간 이런 느낌으로 했어요. 저 자신의 작품에 그냥 더 집중한 거죠. 그랬더니 웃기게도 평단으로부터 인정받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 거죠. “360도”라는 곡을 통해서, 그리고 [비공식적 기록 Ⅱ]라는 밸런스 좋은 앨범을 통해서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현재 힙합 신이 평단과 팬들 사이에 엄청 괴리가 커요. 팬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평단이 인정 안 해주는 경우가 너무 많고, 평단이 인정하는 음악의 경우에는 팬들이 ‘이게 왜? 얘보다 대단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물론 제가 평단에 오른 건 정말 기쁘고 보람차요. 제가 데뷔하고 난 이후 이러는 게 처음이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솔직히 제가 막 갑자기 수입이 늘어나고 인기가 많아지고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이건 약간 한국힙합의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팬들은 평단을 보면서 공감이 안 갈 것 아니에요. 그리고 평단은 팬들을 보면서 ‘너희는 이걸 모르니?’ 이렇게 될 거 아니에요. 보나 마나 뻔하게 말이죠.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그건 다 이게 문화적 접근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평단이 늘 옳은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런 간격은 발전을 통해서 잘 채워져서 평단에 오른 작품들이 대중들이 느끼기에도 ‘그럴 만하다. 멋있다.’라고 생각해서 인기나 인지도 등의 모든 면에서 잘 반영이 되는 쪽으로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다들 문화적으로 힙합을 인식해서 말이죠.






LE: 좀 전에 ‘그냥 나 혼자 해야겠다. 신경 안 쓰겠다.’라고 이야기하셨는데요. 그럼 앞으로도 ADV만 유지하고 회사 없이 인디펜던트로 갈 생각이신가요?


인디펜던트로 계속 할 거냐에 대한 답변은…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는 계획들이 많은 상태이고, (밝히기에는) 시기상조인 것들이 너무 많아요. 중요한 건 형태가 어떠냐가 아니라 ADV는 꾸준히 ADV만이 할 수 있는 ADV만의 무언가를 계속 할 거라는 거예요. 당장 내일 회의가 있는데, 내일부터 저희는 회의 때 간단하게 셀카 식으로 프리스타일을 할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기존의 단체들이 싸이퍼라는 이름을 걸고 나오는 영상들이 너무 멋있게 잘 꾸며져 나오고, 전문적으로 나오는 걸 보고 ‘이게 뭐야?’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 그 친구들을 길거리에서 본 적이 없거든요. 물론, 그 싸이퍼와 이 싸이퍼는 다를 수 있겠지만, 뭔가 힙합에 싸이퍼라는 이름이 붙으면 프리스타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친 느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꾸미고 하는 느낌이 나는 거예요. 녹음해서 오디오를 깔고 액션만 취하는 건 뮤직비디오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근데 그런 게 아니라 거친 느낌의 뭔가를 맡아 보여주는 집단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 멋있고 싶어 하니까요. 흑인 애들이 자기 후드에서 햄버거에 핫 소스 뿌리고 먹으면서 싸이퍼하는 그런 광경을 두고 ‘오 멋있어.’라고 하는 이유는 순전히 ‘오 흑형들이야.’라고 하면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뿐인 거 같아요. 근데 사실 그게 멋있는 이유는 정말 거칠게 힙합다운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찌질하게 보여줬기 때문이거든요. 우탱클랜(Wu-Tang Clan)이 진짜 말도 안 되는 로우파이한 음질로, 있는 그대로 개찌질한 사운드로 뭔가를 했는데, 힙합의 모든 판도를 바꾸고 진짜 엄청난 움직임을 보여줬잖아요. 저는 힙합은 근본적으로 약간 찌질함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멋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 뭔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의 멋을 담당할 수 있는 크루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두가 멋있고 싶어 하니까요.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뭔가를 찍으면 ‘야, 잠깐만.’하고 조던 신고 그런 거 있잖아요. ‘프리스타일? 나 근데 실수하는 건 안 나왔으면 좋겠어.’ 이런 것도 있고요. 있는 그대로의 거친 모습을 누가 보여줄 수 있는가? ADV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더 망가질 것도 없거든. 우릴 만나고 싶으면 싸이퍼에 나오면 돼요. 우리처럼 편안하게 외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보여줄 수 있는 집단이 또 어디 있어요? 감사하게도 계속 우리의 영역이 넓어지고 인정해주는 분들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우리도 바빠지면서 길거리 싸이퍼에 자주 나갈 수 없게 되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1주일에 한 번씩 모이잖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요. 그냥 프리스타일 보여주는 거예요. 실수하는 거 다 보여주고, 병신처럼 하는 거 다 보여주고, 그냥 핸인핸버거 하나 먹으면서 할 거예요. 물론,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요. 수염 막 이렇게 나고는 안 해요. (웃음) 지키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아이디어의 시발점이 뭐였느냐, 이번 ADV 잔치 홍보 영상이었던 프리스타일 영상들이었어요. 다들 많이 못 봤겠지만, 각각 도시별 정보를 프리스타일로 전달하는 거였어요. 초반 8마디는 그냥 다른 얘기 하다가 몇 시, 몇 분, 누구 나오고 이런 걸 프리스타일로 하는 거였어요. 장담하는데 그거 들으면 ‘뭐야, 생각보다 못하네.’, ‘ADV 프리스타일 집단이라더니 못하네.’라고 할 거예요. 그러면 너희가 한 번 그 정보를 읊으면서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아무도 못 할 걸요. 저는 기존의 래퍼들이 프리스타일 싸이퍼에 왔을 때, ‘나는 Ill하고 Sick해.’라는 식의 이야기는 라임 맞추면서 잘하는 건 수도 없이 봤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뭘 먹고 여기 나와서 난 이렇게 살았어.’라는 식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라임을 맞춰가며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유일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허클베리피 형 정도?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허클베리피 형조차도 그때는 랩을 쩔게 한다기보다는 그냥 칠린하는 모드로 바뀌어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그걸 제일 잘하는 건 ADV밖에 없어요. 어쨌든 그래서 ‘우린 이랬어, 저랬어.’ 같은 식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라임을 맞춰가며 수다 떨 듯이 하려고 해요. 정말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인 힙합이죠. 저희는 그런 걸 정말 좋아해서 그런 ADV다움을 계속 보여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건 저희가 레이블이 되든, 누가 회사와 계약을 하든, 어떻게 되든 간에 같을 거예요.






LE: 그 홍보 영상을 보면 굉장히 추워서 괴로워하시잖아요.


맞아요. 진짜 너무 추운 거예요. 심지어 그것보다 잘 나온 랩도 있었거든요. 근데 추워서 입이 안 돌아가서 망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다가 ‘아, 때려치워.’ 하고 끊었죠.






- [비공식적 기록 Ⅱ] -




LE: 다시 커리어 얘기로 돌아오면, 굉장히 다 쏟아 부은 [도착]에 반해 [비공식적 기록 Ⅱ]는 보다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하셨어요. 거리의 이야기를 하고, 또 서사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인 시각이든, 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든 모두 JJK 씨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비공식적 기록 Ⅱ]라는 이름도 그런 이유에서 지은 것인가요?


그렇죠. 몇 년이 지났지? 오랫동안 앨범을 내면서 그 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비공식적 기록] 때만큼 과격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다른 걸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해보고 싶었고, 또 나이가 들었으니까 그때와는 다른 제 시점에서의 인생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LE: 제 개인적으로 [비공식적 기록]에서의 ‘비공식’은 말 그대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람들이 모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공식적 기록 Ⅱ]에서의 ‘비공식’은 아티스트가 무대에서나 음악에서 보여주는 멋진 아티스트로서의 모습이 아닌 길거리에서의 모습,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남자로서의 모습,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모습 등의 한 사람의 전체적인 면모들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아티스트에게 그런 모습은 비공식적인 모습이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코드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뽑아낸다.’였어요.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삶을 투영.’ 이 두 가지였어요. 근데 다만, [비공식적 기록] 때의 JJK는 화가 많이 났고, 힙합이 전부였고, 힙합 외에는 바보였고, 생각하는 것 그대로 뽑아냈던 거고요. 지금의 JJK는 결혼도 하고, 삶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고, 그 와중에 이런저런 일도 있었던 거죠. 삶의 주제 자체가 많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한 코드인데, 궁극적으로는 다른 앨범들도 다 솔직하지만, 컨셉이나 이런 걸 다 떠나서 원초적인 힙합 비트와 사운드 위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한 번 정리하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느낌. 그런 거였어요.






LE: 그런 트랙들도 그렇고, “종의 마지막”은 현재 신에 있는 맹점이나 꼬집지 못하는, 혹은 꼬집기도 하지만 쉬쉬하기도 하는 그런 부분들을 담았는데, 이곳을 향유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트랙이었던 것 같아요.


그 트랙은 제가 해답을 내리고자 했던 트랙이 아니라 저도 모르겠어서 쓴 트랙이에요. 원래 후렴구로 쓰려고 했던 가사가 있었는데, 그게 질문형으로 끝나요. ‘그래서 나도 모르겠어.’라고 하면서 끝나거든요. 그 부분의 플로우가 후렴구답지 않은 디자인을 띄고 있어요. 최종적으로는 딥플로우에게 부탁을 해서 지금의 버전으로 나왔죠. 그 노래 자체는 ‘나도 지금의 방향이 한국힙합의 옳은 방향인지, 해가 되는 방향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시기가 이런 식의 힙합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이고, 내가 이 시대의 마지막인 것 같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LE: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종의 마지막”을 들어보면 공연 문화나 팬들의 문화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JJK 씨가 대규모 옴니버스 공연에 안 나가는 편이시잖아요. 기본적으로 ADV 분들이 올티 씨 빼고는 모두 안 나가는 편인데, JJK 씨 정도의 분이 그런 곳에서 섭외가 안 들어올 리가 없지 않나요?


아니에요. 정말 안 들어와요. 물론 페이가 맞아야 계약이 되겠지만, 제가 다른 래퍼들에 비해서 페이가 높다고 절대 생각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이리저리 들어보니까 ‘뭐야, 내가 엄청 적게 받고 있었네.’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 뭔가 그래도 평단에서의 인정이 있었기에 양심적으로 조금 올라가긴 했지만, 그동안 정말 콜이 안 와서 안 간 거예요. 제가 말한 게 그거예요. 저는 완전 외곽에 있어요. 지금 이 인터뷰가 나오면 악플이 달릴 수가 있어요. JJK가 뭔데 인터뷰가 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만큼 저는 제가 한 행동과 업적들이나 이뤄낸 모든 거에 비해서 진짜 아무것도 받아낸 게 없어요. 그러니까 힘이 다 떨어지고 ‘에이, 때려치워. 난 나 혼자 할래.’라고 하게 되고, 보람이 안 느껴질 만도 하죠. 무슨 쇼, 무슨 쇼라는 옴니버스식의 공연들은 단순히 그냥 저에게 연락을 안 해요. 그 사람들의 물망에 제가 없는 거예요. 솔직히 불러주면 당연히 고맙긴 하겠지만, 사실 안 불러주는 덕택에 저는 제 컨텐츠를 많이 만들 수 있었어요.




MC들이 부지런하면 내가 정말 힙합에 있어서 뭘 하고 싶어하나 생각하면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잖아요? 정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작년에 저희가 스트릿 랩 앁(Street Rap Shit, 이하 ‘SRS’)라는 한국힙합 역사 속에 없었던 전국 길거리 공연을 한 번 돌았어요. 그리고 이건 매년 계속 있을 거예요. 올해도 할 거고요. 그건 옴니버스식의 공연을 많이 뛰는 래퍼가 아닌 저처럼 완전 외곽에서 나 혼자만 독고다이로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연이었어요. 전 상대적으로 그럴 시간도 많고요. 제가 JJK라는 걸 보여줄 수 있을만한 컨텐츠를 안 보여줄 이유가 없잖아요. 꼭 불러줘야 나가나? 내가 내 걸 만드는 거예요. SRS도 만들고, ADV 잔치도 하고요. ADV 잔치가 이번엔 진짜 관객이 엄청나게 늘었거든요. 저는 다른 도시를 동시에 열었을 때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근데 다 성공적으로 끝나고, 스냅백 만들어서 판 것도 다 팔렸어요. 그래서 저희는 ADV다운 걸 더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안 불러줘도 솔직히 상관없어요. 물론 돈 벌 수 있으니까 좋기는 하겠죠. 제가 저를 더 홍보할 수 있으니까 고맙죠. 하지만 안 불러준다고 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어떡하지?’ 이런 생각은 없어요. 안 불러주면 안 불러주는 대로 저는 저를 더 알릴 수 있는 참신한 뭔가를 만들 거예요. 그리고 그건 결국 옴니버스식 쇼들이 적을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더 저다운 걸 많이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할 거니까요. 저를 안 부르더라도 그 시간에 저를 보기 위해 온 관객들을 더 많이 만들 거예요. ADV 잔치에 오면 ADV를 다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한테는 DJ 켄드릭스라는 말도 안 되는 DJ가 있어요. 걔가 이미 옴니버스식 공연을 만들고 있잖아요.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에요. 옴니버스 공연을 뛰고 싶으면 거기 가서 우리를 알리면 되는 거예요. 잔치에 와서 ADV 다 보고, 개별적으로도 우리는 우리다운 홍보를 이어가면서 JJK만이 할 수 있는 SRS도 가지고 있으니까 됐죠. 그리고 저희는 아까 말씀드렸던 프리스타일 영상도 계속 올릴 거예요. 그러면 뭐, 말 다 했죠. 오히려 안 불러주면 걔네들이 경쟁할 수 있는 브랜드를 더 만드는 꼴이 되는 거예요. 정리하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 때문에 커리어 걱정은 안 해요.






LE: 저는 “종의 마지막”에서 말하는 그런 문제들이 있으니까 섭외가 들어와도 그런 걸 안 하겠다는 태도라서 안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런 건 있죠. 뜻이 안 맞거나, 좀 아니다 싶으면 당연히 하고 싶지 않죠. 근데 저도 인간인지라 유부남이니까 페이가 당연히 필요하잖아요. 페이를 준다, 페이가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조건만 맞으면 다 뛸 거예요. 그리고 다른 래퍼들과는 다르게 뭔가 더 열심히 해줄 게 없을까 생각할 거예요. 왜냐하면, 돈을 받으니까요. 여담인데, 옴니버스식 공연들이 너무 아이디어를 안 짜내려고 해요. 다 경각심을 가져야 해요. 무슨 쇼, 무슨 쇼, 많긴 한데 그래서 차이점이 뭐라는 거예요? 다 똑같은 애들 나오고, 누구는 이번에 안 나오지만 다른 공연 가면 또 보잖아요. 도대체 무슨 차이인 거예요.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쪽 사람들이 당연히 저를 부를 리가 없죠. 잔챙이 같은 애들, 돈 잘 안 되는 애들 다섯 부른다 쳐도 돈 되는 애 한 방이면 다 메우는데, 저를 굳이 부르겠어요? 그렇잖아요. 뭔가 평단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돈이 될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 저를 안 부르겠죠? 그러니까 되게 웃긴 거예요. 경각심이 없다는 거죠. 대충 구색 맞추기로 잘 되는 애들 세 명 정도 가져다 놓는데, 걔네들 페이 다 줘도 애들 쫙 몰려서 이미 그거보다 더 벌 수 있죠. 요즘 쇼들이 대체로 그러는데, 그러니 굳이 JJK를 부를 필요가 없는 거죠. 반면에 올티는 자주 섭외가 와요. 왜냐하면, 올티는 핫하거든. 낸 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뭔가 핫하고 그러니까 자주 가죠.






LE: 올티 씨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조언이나 그런 건 없었나요?


전혀 없죠. 공연하는 데 있어서 굳이 막을 이유가 없잖아요. 걔는 그렇게 하면서 지 영역을 펼쳐나가는 거죠. 제가 하는 말은 그거예요. 쇼들이 아이디어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시장인 거예요. 시장에서 ‘와, 오늘 뭐도 있고, 뭐도 있어요. 빨리 와서 사세요.’라고 하는 거랑 똑같이 보여요. 그러니 만약 제가 섭외를 받아도 재미가 없죠. 그냥 저는 제가 할당받은 20분만 하고 내려오면 끝이니까요. 아마 다른 래퍼들도 다 그런 이유일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힙합을 사랑한다면, 옴니버스 공연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아이디어를 좀 냈으면 좋겠어요. 공연 기획자가 그냥 A&R이 아니잖아요. ‘너 페이 얼마, 너 페이 얼마.’ 이런 건 제 부인도 할 수 있어요. 우리 부인이 더 잘할걸? 돈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부인이 더 잘하지. 공연 기획자라면 그 공연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홍보에 있어서 새로운 영역을 열어야 해요. 또, 그걸 보고 작은 공연의 기획자들이 영감을 받아서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식의 창의적인 움직임이 생기는 식이어야죠. 근데 전혀. 그런 입장이지만 그래도 섭외를 막지는 않습니다. 불러주면 감사합니다. 지금 약간 제 무덤 파는 간지를 내고 있는데, (전원 웃음) 토로하고 나서 살짝 정신 차렸어. 어쨌든 그래도 ‘불러주면 감사합니다.’에요. 역으로 이럴 순 있지. 저 같은 경우는 불러주면 다른 래퍼들이 하는 것과는 다르게 더 열심히 홍보해줄 거예요. 페이 값을 제대로 하겠다는 거죠. 그런 뭔가 효과가 있어야지, ‘아, 네, 알겠습니다.’하고 당일 리허설도 안 하고 맨날 하는 노래 좀 하다가 끝내고, 사람들도 ‘예매됐대? 얼마 됐대?’ 이러는 건… 참 재미없는 문화예요. 그리고 저는 자신 있는 게 그런 레이블들의 공연 사이에서도 ADV 잔치는 ADV 잔치를 와야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어요. 그건 제가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와서 느껴야 해요. 진짜 다르다는 걸 온 사람들은 다 알아요.






LE: [비공식적 기록 Ⅱ] 얘기를 좀 더 이어가 보면, 가사를 보면 인디펜던트 레코즈의 제의를 받았다고 나와 있는데, 안 들어가게 된 이유가 궁금하고요. 인디펜던트 레코즈나 지기펠라즈(Jiggy Fellaz) 전에 다른 곳들의 제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우선 처음에는 (제의가) 별로 없었어요. 초창기에는 별로 없었는데, 그런 건 있었죠. 지기 펠라즈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연락이 와서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ADV가 신경 쓰여서 거절했어요. 한참 지나서 또 (지기 펠라즈와) 이야기할 날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ADV 전반적인 분위기가 ‘만약에 한 명이 잘 될 수 있으면 하는 게 옳은 것 같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사실 저는 주변 사람들이 활동하는 내내 ADV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ADV 너무 고집하지 마. 애들 그만 챙겨.’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때 ‘나만 생각할까?’ 해서 두 번째 잠깐 이야기가 오갔을 때 이제는 진짜 하고 싶다고 말했었죠.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지기 펠라즈가 없어졌어요. (웃음) 그냥 폭파됐어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인디펜던트 레코즈에서 바스코 형이 제의를 해줬어요. ‘같이 할래?’라고 하셨는데, 저도 약간 기대하기도 했었죠. 음악적으로 색깔이 맞았거든요. 그리고 바스코 형의 음악적 방식이 제가 하는 음악적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요. 바스코 형이 또, 저한테 몇 안 되는 음악적 은인?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어서 얼마든지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틀 정도 후에 바스코 형이 ‘인디펜던트 레코즈가 아직 새로운 멤버를 멋있게 받아서 진행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내부적으로 너무 안정성이 없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라고 하셔서 괜찮다고 했죠. 늘 혼자 했으니까 알겠다고 했죠. (웃음) 그 외에 (레이블 쪽에서) 더 콜이 있지는 않았어요.






LE: [비공식적 기록 Ⅱ] 발매 당시에 새로운 방식의 판매를 택하셨는데,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만족하는 편이신가요?


네. 전 좋아요.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360도”가 인정을 받기 전까지 제가 새로운 앨범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되게 많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앨범을 내도 이걸 홍보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힙합플레이야에 기사를 띄우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근데 그건 모든 래퍼가 사실 비슷해요. 다만 사람들이 ‘오, 앨범 나왔네.’라는 반응을 더 많이 보이는 건 그 아티스트의 이름과 그 아티스트가 속한 집단, 그 아티스트의 앨범에 있는 피처링, 사람들의 샤라웃 등 때문이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외곽에 있는 제가 앨범을 냈을 때는 ‘오, JJK 앨범 나왔네.’라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제가 있는 포지션에서는 솔직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만약에 “360도”가 평단의 인정을 받는 걸 통해서 JJK의 새 앨범이 나왔다는 걸 안 사람들이 더 많아진 상황에서 앨범을 판매했다면 더 팔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근데 사실 뭐, 굳이 귀찮게… (웃음) 이미 나오기도 했고요.


사실 처음에 [비공식적 기록 Ⅱ]를 믹스테입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믹스테입이라면 뭔가 거칠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직접 배송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이들 하는 유통사한테 유통을 맡기는 방식을 해봤자 돈만 떼이지, 이러나저러나 팔리는 게 똑같을 것 같다면 저는 제 손으로 팔고 더 많이 남기겠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그게 뭔가 더 거칠고, 힙합의 방식이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정규도 아니니까요. 근데 그렇게 나오니까 다들 정규 앨범이라는 거예요. 그냥 ‘그래. 그러면 정규로 할게.’라고 했죠. 이제는 진짜 그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1집, 2집, EP… 그래서 저는 이제 작품에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올바르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게 세 트랙이면 세 트랙으로 끝내요. 올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20트랙이 필요하면 20트랙을 다 써야겠죠. 단순히 그거밖에 없어요. 규모나 형식에 따라 정규, EP, 믹스테입 같은 타이틀을 붙이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세상인 것 같아요.






LE: 그래서 이후에 맥시 싱글이나 무료 공개곡을 발표하신 건가요?


네. 그렇죠. [Thank You, Summer]는 맥시 싱글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는데, 뭔가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짧은 거예요. 그냥 ‘여름이 좋아.’ 이런 느낌으로 낸 거라서 작품은 아니니까 그냥 디지털로 내자고 했는데, ADV의 루피가 ‘싱글은 한 곡만 있는 거고, 한 곡 이상 들어가는 싱글은 맥시 싱글이래.’라고 해줘서 그러면 맥시 싱글. 이렇게 정한 거죠.






LE: [비공식적 기록 Ⅱ]가 키마(Kima) 씨와 같이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같이 하게 된 계기 같은 것이 궁금하거든요. 사실 키마 씨가 인지도가 높은 건 아니잖아요.


무명이죠. 키마를 알게 된 건 키마가 언제 프리스타일을 하려고 싸이퍼하는 아이들 사이에 있었어요. 프로듀싱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걔가 프리스타일을 하거든요. 근데 걔가 은근히 잘해요. 어지간한 애들보다 잘해요. 그게 좀 아이러니한 일인데, 아무튼 걔가 프로듀싱을 한다는 걸 알고 만든 걸 들어보자고 했는데, 그때는 아마추어 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나 봐요. 그 와중에 만든 비트들을 쭉 받아서 들어보는데, 걔가 그 당시 만든 비트들이 완전 막 깊게 작품을 만든 그런 느낌이 아니어서 습작도 있고 그랬어요. 한 폴더에 모아서 보내줬는데, 어떤 건 짧고,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루프밖에 없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더 좋았어요. 왜냐하면, 믹스테입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저는 [도착] 때 정말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속 시원하게 랩 해보자는 생각이 있어서 [비공식적 기록] 때의 마인드로 돌아가서 시원하게 한 번 해본 거죠. 아무튼, 랩을 하면 할수록 키마의 비트가 랩을 하기 정말 편한 거예요. 시원하게 뱉으니까 더 색다른 맛으로 잘 나오기도 하고요. 스킬적으로도 욕심나게 하는 오묘한 맛도 있었어요. 저랑 잘 맞았던 거죠. 그런 덕에 “360도”라는 좋은 곡이 나오게 되고 그런 거죠.






LE: [비공식적 기록 Ⅱ] 얘기까지 해봤는데, 저는 그 이후에 7주년 기념으로 나온 “Flesh”라는 트랙을 언급하고 싶어요.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걸 좋아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음악을 들었을 때 감정이 느껴지는 걸 좋아하는데, 진짜 몸이 반응하는 거 있잖아요. 들으면서 아트워크만큼 살벌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스킬적으로도 최고로 꼽을 수 있는 트랙이 아닌가 싶어요. 가사가 굉장히 직설적이고 적나라하던데, 당시 밝히신 대로 정말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것이었나요?


불특정 다수죠. 저는 그런 게 있어요. 힙합이란 테두리 안에서 제가 봐왔던 꼴불견들이 적립되듯이 쌓이잖아요. 근데 누가 뭘 했다는 건 다 잊히게 돼요. 그냥 하나의 아이디어가 남듯이 ‘이런 거 되게 별로야.’ 이렇게 제 기준에서의 좋은 것과 나쁜 것만이 남고 나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특정 다수도 아니에요. 인간을 겨냥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 행위들? 그런 방향들이 저와는 안 맞는 거죠. 그게 옳다고 생각 안 해요. 그 트랙도 어떻게 보면 [비공식적 기록]처럼 쓴 거죠. 시원시원하게 써보자고 해서 쭉 썼어요.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ADV들은 다 알지만 사실 제가 ‘컨트롤 대란’ 때 벌스를 썼었어요. 사실 저는 그때 대략은 예상했었어요. 미국의 ‘컨트롤 대란’이 터지자마자 ‘누군가는 컨트롤을 따라 하겠군. 아무도 할 사람이 없지만 스윙스가 하겠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스윙스는 저돌적이니까요. 그리고 머리가 되게 좋은 친구거든요. 저는 몇 번밖에 안 만나봤지만 딱 보면 알 수 있어요. 되게 머리가 좋은 친구고, 그러면서도 저돌적인 면이 있어요. 가끔 짐승처럼 돌변하는 분노를 안고 있는 친구라는 걸 알아요. 나이 먹어가면서 그런 부분들을 조금씩 삭혀가는 것 같지만요. 제가 느낀 스윙스는 그런 친구였어요. 그래서 ‘스윙스가 하겠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몇백 마디 랩을 계속해서 뱉는 걸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물론, 그 안에서 플로우를 조절함으로써 음악적인 연출을 자아내는 묘미가 도전 과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냥 쭉 랩을 몇백 마디씩 하는 건 제가 방식과는 좀 거리가 있는 방식인 것 같아요.






LE: 그럼 그 당시에 공개됐던 트랙들이 구성적인 측면에서 아쉬우셨겠네요.


제가 들었던 것 중 다수가 그랬어요. 그 와중에 놀랐던 건 많지 않아요. 제가 지쳐서 다음 곡으로 넘기고 그랬죠. 근데 스윙스의 트랙을 들은 그 날 따라 여느 때와 다르게 ‘만약 내가 이렇게 구성없이 랩을 쭉 뽑아내는 걸 한다면 같은 비트에 스윙스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늘 말했듯이 저는 한 명의 MC로서 경쟁심리, 배틀이 아니라 ‘내 스킬로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라는 도전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게 정확히 ‘컨트롤 대란’에 대한 MC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요. 그 뭔가 배틀 식으로, ‘숨겨왔던 나의~’ 이런 뭔가를 까뒤집는 게 아니라 MC로서 스킬과 가사적 기술들로 ‘내가 더 잘해.’라고 뽐내며 올림픽처럼 되길 기대했거든요. 한국힙합에서 안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무튼 저는 순수한 심리로 스윙스가 한 것과는 다르게 더 재미있게 ‘얘랑 똑같은 길이의 랩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한 번 써봤어요. 그래서 막 재미있게 쓰다가 그 와중에 어글리덕(Ugly Duck)과 테이크원(TakeOne) 거가 나온 거예요. 근데 걔네들은 스킬의 배틀이 아니라 완전 살벌한 디스를 했었잖아요. 그때 제가 흥미를 잃었어요. 여기에서 제가 스킬이 어쩌고 하면서 진정한 MC로서의 대결, 기술에 대한 욕구 이런 걸 아무리 내세워봤자 이제는 중심이 그런 게 아닌 이슈로 넘어갔고, 그 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해 봤자 의미가 없을 거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내려놓았는데, 그렇게 랩을 쭉 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 계속 숙제처럼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마침 우연한 계기로 제가 외국인 학교에 다니던 시절, 앞서 말했던 처음 학교 공연 때 관객석에서 봤다던 외국인 후배가 저를 알게 되어서 페이스북으로 자기가 그때 제 무대에 감명을 받아서 지금까지 프로듀싱을 하고 있다면서 자기 비트를 들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 듣게 되고, 그중에 ‘이것 좀 괜찮은데?’ 싶은 걸 골라서 약간 후배 챙기기 식으로 ‘우리 한 번 같이 해볼래?’라고 했죠. 근데 그때 “Flesh”의 비트 구성이 1절과 후렴과 2절이 다 다른 루프라서 다채로웠어요. 그래서 ‘이걸 다 쭉 랩으로 해도 그때그때 루프에 맞게끔 플로우도 바꿔보고 하면 내 관점에도 맞으면서 랩을 쭉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시원하게 ‘컨트롤 대란’ 때 했던 것처럼 기술적으로 평상시에 해보고 싶었던 스킬들도 마음대로 해보게 됐죠. 그러면서 만들어진 것이 “Flesh”에요. 어떻게 보면 메시지적인 것보다 약간 똥싸기 식 스킬? (웃음) 그렇다고 진심이 아닌 가사는 아니고요. 스킬 쪽으로 더 치중하다 보니까 그만큼 쓰는 내용에 있어서 대상이 없는 거죠. 진짜 불만 자체를 쓴 거죠.






- 못다 한 이야기 -


LE: 다른 얘기를 더 해볼 텐데요. 우선 ‘ADVMC(ADV+VMC)’ 얘기를 잠깐 해볼게요. 다른 데서도 말씀을 하셨을 것 같기는 한데, ‘ADVMC’를 비스메이저(Vismajor)와 함께하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ADV의 조이레인이라는 형이 덩치도 그렇고, 하려고 하는 음악적 색깔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 ADV보다 비스메이저와 좀 더 맞닿아 있어요. 그래서 비스메이저를 되게 좋아해요. 반 정도는 팬심으로? 근데 또, 그 형이 일하는 영역에 비스메이저가 자주 출몰해요. 그래서 옛날부터 안면은 트여있던 사이인지라 인사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그런 상황이었는데, 조이레인 형이 계속 ‘같이 뭔가를 하면 재미있겠다.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제 입장에서는 물론 좋지만, 퓨전을 할 때 양쪽의 기가 동등해서 시너지를 터트릴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고, 그때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입지와 비스메이저가 가진 입지가 차이가 있지 않나 싶었어요. 비스메이저는 훨씬 더 강하고, 딥플로우라는 지붕이 되게 크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개별적인 멤버가 좀 더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비치던 사이에 딥플로우와 우연히 기회가 생겨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딥플로우도 약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되게 웃긴 건 딥플로우도 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 ‘너희보다 우리가 약해.’는 아니지만, 겸손한 이야기를 했고, 저희 쪽도 뭔가 ADV에 대해서 겸손하게 얘기를 했죠. 서로가 약간 조심스럽게 우리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하면서 마음이 맞은 거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냥 단순히 ADV도 나오고 비스메이저도 나오는 공연이라서 ADV 공연진 쭉 1부, 비스메이저 공연진 쭉 2부 이건 저희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각 크루가 가지고 있는 색채가 있는데, 그걸 못 보여줄 것 같으면 뭐하러 하냐는 거예요. ADV는 ADV가 가진 색깔이 있고, 비스메이저는 비스메이저가 가진 색깔이 있고, 이게 합쳐지면 또 다른 색깔이 나올 텐데 그냥 똑같이 여러 명이 나와서 하는 공연은 절대 하기 싫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뭔가 더 확실하게 단체곡으로 멤버들을 섞은 음원도 만들고, 공연 자체도 각자의 새 멤버들은 초반, 각자의 베테랑들은 후반 이런 식으로 해서 단체곡도 하고 그랬죠. 또, 대표곡들을 주고받는 타임도 만들면서 그렇게 끌어올리고 해서 최대한 그럴싸하게 했죠. 그래서 음원을 담은 CD도 한정판으로 내고, 최대한 페스티벌 간지로 한 거예요. 그렇게 한데에 있어서 비트메이커도 비스메이저가 많고, 디자인 쪽으로도 비스메이저가 훨씬 강력하고 하니까 필요한 영상이나 컨텐츠들은 우리가 제작하겠다고 했죠. 행정이나 돈 계산 이런 건 늘 제가 했기 때문에 또 저희가 맡아서 진행했고요. (웃음) 되게 죽이 잘 맞은 케이스였죠.






LE: 앞으로도 ‘ADVMC’라는 이름 아래 또 뭔가를 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또 할 거예요. 이번에 대구에서 ADV 잔치를 했는데, 비스메이저의 던밀스(Don Mills)랑 딥플로우가 왔어요. 근데 그때도 저랑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않았는데, ‘ADVMC 2 또 해야지.’라고 하면서 멤버들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더라고요. 당연히 저는 하고 싶고요. 하지만 늘 말했듯이 밸런스도 맞아야 하고, 훨씬 더 멋있고 재미있게 ‘ADVMC’만의 무언가를 또 해야만 할 수 있겠죠? 비스메이저에 뒤떨어지지 않게 ADV가 더 열심히 해야죠.






LE: 싸이퍼에 대한 얘기도 빠질 수가 없는데, 우선 작년에 SRS도 그렇고, 랩어택도 다시 하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많은 움직임의 스타트를 끊으셨는데, 그렇게 한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해요.


진짜 그냥이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는 걸 많이 하고 싶어서요. 저 자신이 [도착] 이후로 너무 재미가 없어져서, 보람이 안 느껴져서 보람을 느낄만한 일을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야 했어요. 또, 랩어택을 다시금 활발하게 운영하는 건 아직도 저의 숙제에요. 근데 결혼도 하고 신경 쓸 게 많아지니까 자주 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랩어택이 또 애매한 게 예전에는 싸이퍼를 열면 그게 곧 랩어택이었는데, 이제는 윗잔다리 공원에서 꾸준히 사이퍼를 열어주고 있으니까 그것과 차별화된 싸이퍼를 열어야 하고, 재미있는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SRS가 대체해주고 있는 부분도 있고요. 아무튼, 제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거예요.






LE: 싸이퍼 자체에 대한 생각이나 부여하시는 의미도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죠.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면, 저도 실제로 힙합의 탄생을 제 눈으로 목격하지는 않았잖아요. 1973년도에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요. 근데 제가 여러 가지 다큐멘터리나 이야기를 보면서 제가 힙합을 동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날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다 하는 것.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 있잖아요. 정말 멋있었어요. 자본이나 구색이 맞춰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나와 재미있게 노는 것, DJ는 ‘나 DJ 할 줄 알아.’라고 하면서 장비 가져와서 길에 꽂고, 장판이나 남은 박스 가지고 나와서 비보이가 돌고요. 주변에서 환호하고 말이죠. 프리스타일 하고 싶으면 누구든지 흥에 겨워서 마이크 잡고 하고, 내가 모르는 남이 프리스타일하러 나와서 배틀도 하고, 끝나면 악수하고 ‘야, 너 잘한다.’라고 하고요. 그런 멋있는 힙합?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그게 저는 태초의 힙합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갱스터 힙합 이런 게 다 그 이후에 나왔다고 인식하고 있어요. 그런 자유로움과 동네 간지? 길거리 간지. 그런 자유로움이 있고, 또 솔직하니까 갱스터는 갱스터의 이야기를 하는 거고, 허슬러는 허슬러의 이야기를 하는 거고, 아무것도 아닌 범생이는 범생이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게 하나의 힙합이라는 거대한 코드 안에서 놀 수 있는 건데, 지금의 메인스트림 힙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간지나는, 멋있는 모습이 있을 수 있는 건 그런 역사를 다 순차적으로 밟아 와서라고 생각해요. 미국힙합도 그간 오류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지만, 그 문화에 맞게끔 잘 발전했기 때문에 지금의 영광스러운 메인스트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힙합은 역사적으로 인터넷 통신에서 시작했단 말이에요. 인터넷 통신에서 만나서 시작했고, 외국의 뮤직비디오를 동경하면서 시작했어요. 그런 모습을 흉내 내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계속 그 위에서 쌓아왔던 많은 해프닝들과 역사적인 기록들이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그래서 힙합이 뭐야? 그래서 왜 힙합은 그래?’라고 하고, 평단과 매니아의 취향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고, 대중이 보는 힙합과 우리가 보는 힙합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빠순이는 왜 생기며, 그럼 빠순이는 왜 싫어하며, 왜 힙합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게 힙합적이지 못한 것이며, 왜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지 등등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에요. 그 이유는 계단을 밟지 않아서 그래요. 그건 한국힙합 역사상 어쩔 수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걸 동경함과 동시에 이 문화가 신 저변에 깔려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Reset The Game”에서 제가 말했던 내용과 맞닿아 있어요. 만약에 제가 정말 시간을 돌려서 이 게임을 완전 리셋할 수 있다면 중요한 건 PC통신, 커뮤니티로 힙합이 퍼져나가는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힙합이 생판 모르는 사람의 피부에 닿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느냐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처음 보여지는 그림이 이러니까 힙합을 재해석시켜야 한다는 거예요. 만약에 처음 봤을 때 힙합을 본 게 아이돌이에요. 그럼 그 사람을 나중에 다시 만나면 ‘야, 그게 아니라…’라고 또 이야기를 해줘야 하잖아요. 이런 모든 게 다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싸이퍼, 길거리에서 믹스테입 파는 거, 길거리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패션, 일상 속에 녹아 들어있는 힙합들이 중요한 거예요. 근데 가면 갈수록 힙합을 위해서 멋을 부리기 시작하고, 또 그 위에 얹혀지는 것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느껴져요. 그렇게 본질을 잃어가면 ‘힙합은 이런 거예요.’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에요.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유학생들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코스프레’가 되는 거예요. 한국힙합을 만들려고 하면 우리가 한국에서 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아야 하며, 그래서 한국에 있는 고유의 문화 중에서 어떤 부분이 원초적인 힙합의 무엇과 맞닿아서 한국다운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MC들과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하는데, 가면 갈수록 그 연구는 이루어지지가 않고 있죠. 그 연구를 통해서 나오는 작품들도 사라지고 있고요. 또, 그렇게 나오는 작품들은 꼰대의 작품들이 되어가고 있고요. 아귀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한국의 힙합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작품을 내놓아야 이게 한국인으로서 힙합을 하는 것에 대한 문화적 가치가 더 상승할까?’ 같은 생각을 아무도 안 하잖아요. 그리고 계단을 밟지 않으니까 이런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떤 멋을 낸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지금 랩을 하는 친구들은 아예 생각도 안 날 거예요. (그 친구들에게는) 그냥 랩은 멋있는 거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러니까 저는 이 거친 그대로의 문화, ‘이거 멋없네.’라고 할 만큼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 속에 있는, 피부로 와 닿는 힙합이 어떻게 보면 메인스트림에 있는 것보다 더 저변에 깔린 상황이 되어야 우리가 말하는 힙합의 대중화라는 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옷 입는데 생각해요? 이게 그냥 예뻐서 입는 거잖아요. 만약 ‘나는 힙합 하니까 이거 입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대중화는 이미 끝난 거예요. 그만큼 우리가 정말 피부로, 한국인으로서 힙합이라는 걸 느끼려면 피부로 와 닿아야 하고, 그만큼 당연하게 길거리 저변에 깔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이 움직임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저 혼자서라도 제 신념에 따라 움직일 거라는 거죠. 그리고 그 느낌을 이어받은 ADV가 저를 도와줄 거고요.






LE: 그럼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모습들이 지금 한국 안에서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로는 아니죠. 많은 사람들, 많은 래퍼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너무 많은 걸 신경 써야 하잖아요. 한국의 정서와 힙합의 정서가 어디가 맞아떨어져야 할 것이며,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건 음악적, 문화적 트렌드가 또 있죠. 그런 트렌드가 진행됨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A와 B가 합쳐서 C가 되면 그건 더 이상 A도 B도 아닌 아예 다른 거잖아요. 그러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한국’과 ‘힙합’이 같은 단어에서 공존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어려운 상황인 거예요. 새로운 걸 만드는 건 그냥 섞어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공존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거예요. 그런 거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제로는 아니지만, 너무 어려워서 그 결실이 잘 보이지 않는 거죠. 그걸 또 행동으로 하자니 내 인생의 무언가를 걸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익을 생각하면 단순히 정말 거칠게 덤벼들기가 어렵죠. 이미 저변에 깔려있는 인식도 멋없는 걸 하게 되면 MC로서의 생명이 깎이니까요. 그냥 막 뛰어들기도 힘들고… 하지만 다들 생각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 안 해요. 다들 나름대로 신념이 있어서 행동하는 거겠죠? 그리고 어떻게 보면 궁극적으로 지금 신은 넓은 의미에서의 배틀이에요. 그래서 내 신념이 살아남느냐, 남의 신념이 살아남느냐는 거죠. 큰 판의 배틀이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말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존나 병신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이게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냥 재미있으면 해. 그게 답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한 번 지켜보자는 거죠. 그래서 무엇이 한국힙합을 살아남게 하는 건지, 그래서 무엇이 해가 되고, 득이 되는지 지켜보자는 거죠. 큰 의미의 배틀인 거예요.


근데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한국힙합이 다 그렇게 움직일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이곳을 더 좁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제 인터뷰이니까 제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제가 배틀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하는 말에 더 많은 사람이 감화되기를 원하며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저와 반대되는 사람은 그쪽의 사람들과 더 많은 감화를 만들어 가겠죠. 그런 식으로 많은 테두리와 파벌이 생겨나고, 그 모든 파벌이 각자 존중을 받으면서 힙합이 커질 수 있다 생각해요. 그러면 ADV가 더는 외곽이 아니게 될 테고, 외곽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지게 될 거예요. 그런 것이 힙합의 대중화라 생각해요. 더 커져야 해요. 지금은 너무 작고 좁아요.






LE: 싸이퍼 자체가 많아지는 것도 좋지만 그게 발전하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그것의 일환으로 SRS 있는데, 2014년에 있을 SRS는 새롭고 재미있을 거예요. 뭐, 그건 다음에 확인하실 수 있을 테니까 넘어가고, 싸이퍼는 확실히 문제에요. 언제나 나오는 사람만 나오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굳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모두의 마이크>가 처음 열렸을 때 구경을 갔었는데, MC 메타 형이 이런 일에 있어 아이디어나 조언해 줄 것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무래도 애들을 모으고 랩을 하는 자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근데 사실 제가 뭐라고 어떻게 MC 메타 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웃음) MC 메타 형은 한국힙합을 이끈 사람인데… 아무튼, 사람을 모으는 것이 진짜 어려워요. 우선 1번은 싸이퍼가 매력적이어야 사람이 온다는 것. 싸이퍼는 랩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랩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야 오게 된다는 거죠. 어쨌든 멋있어야 하고 힙합적으로 이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공감해야 하는데, 싸이퍼가 멋있어지자니 기존의 프리스타일을 하는 래퍼들이 잘 못해요. 못하는 친구들이 와서 연습하듯 랩을 어기적어기적하며 해 봤자 랩을 하고 싶은 친구들이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잘하는 친구들만 나오게 되면 다른 친구들이 낄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요.



그리고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싸이퍼에 나오는 친구들은 대부분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아요. 대부분 금전적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죠. 제가 "360도" 가사에 썼듯이 대부분 무지티에 후드 뒤집어쓰고 오고, 그나마 그 정도면 다행이지 그냥 교복을 입고 오고, 신발도 다 구리고… 힙합의 무언가를 찾을 수 없는 패션으로 오는 친구들이 많아요. 이런데 랩을 하고 싶어하는 어떤 친구가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매력을 느끼겠어요? 단순히 나와서 프리스타일을 한다는 행동 자체 외에는 매력적인 요소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나서서 '내가 랩어택을 만든 JJK야. 너희 옷 좀 잘 입고, 프리스타일 연습 좀 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아무리 제가 윗잔다리 공원에 나와 프리스타일을 하는 동생들을 안다고 해도 제가 개인적으로 '아… 정말 너 옷 좀... 아…' 정도로는 할 수는 있어도 (웃음) 제가 말도 안 되게 대전에서 싸이퍼 하는 친구들에게 '야, 싸이퍼가 잘 되려면 이렇게 하라고.'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그런 바람은 있지만… 그게 정말 어려워요. 저도 그냥 하나의 싸이퍼를 여는 사람이지, 제가 전국의 싸이퍼를 다 관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저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고, 싸이퍼에 나오는 친구들이 이 인터뷰를 본다면 함께 고민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그 싸이퍼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고, 시스템이 잘 돌아가서 싸이퍼에서 랩을 잘하는 친구가 리튼도 잘하게 되고, 그 싸이퍼 출신이라는 걸 대표하며 활동하면서 이 업계로 들어올 수 있게 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개개인이 단순히 PC방 가듯이 놀러 나가는 기분보다는 어느 정도의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문화에 대한 애착을 더 가져야 해요. 하지만 이런 것을 강요할 수는 없죠. MC들에게 이 문화는 플레이스테이션과 같은 게임, 놀이일 뿐이니까요.






LE: 레슨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보죠. JJK 님 본인의 생각은 굉장히 확고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레슨을 한다고 하면 보통 욕을 많이 하죠. ‘어떻게 랩을 레슨으로 가르칠 수 있느냐.’, ‘힙합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 등의 말들이 있잖아요. 근데 일단 힙합은 경험이죠. 랩은 보컬의 한 형태이고요. 전 라임을 배치하고, 리듬을 타고 하는 건 학습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레슨 문화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면 우선 학원부터 알아보고 배우려고 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이것이 한국이에요. 이것에 대해서 욕하고 싶으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차라리 나라를 뜨는 게 더 빠른 것 같아요. (웃음) 자연스럽게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 제공하는 사람이 생긴 거라고 봐요. 힙합 교육 인프라가 확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든 면이 있어요.


아무튼, 제 생각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힙합은 경험, 하지만 랩은 보컬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학습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예술은 경험이에요. 하지만 그 예술을 찾도록 누군가가 도와줄 수는 있다는 거죠. 영감은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열망만 너무 앞서 영감을 찾는 방법을 모르는 상황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 때문에요. 창조적이게 되는 방법 자체를 잘 모르게 되고, 배우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올바른 예술 교육을 제가 아는 선에서 해 나가는 거죠. 힙합 안에서, 랩을 통해서 창의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랩 레슨을 받으러 오는 친구들이 모두 힙합 언더그라운드 MC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라 생각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아요.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취미로 랩을 하려고 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요. 너무 자신감이 없어 극복을 위해 오는 친구들도 있고요. 어떤 친구는 장애가 있었어요. 장애가 있는데 랩이 너무 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랩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대요. 그 친구가 '나는 힙합이야!'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건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단지 그 레슨생에게 랩을 통해 올바르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거예요. 하지만 랩이니까 랩의 기본적인 규칙은 지켜야 한다 생각해요. 제가 처음 레슨생을 받으면 물어보는 질문이 있어요. '네가 원하는 건 랩을 잘하는 것이냐, 아니면 힙합을 잘하고 싶은 것이냐?'에요. 그렇게 질문하면 대부분 아이들이 랩과 힙합의 경계를 몰라요. (웃음) 그러면 또,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시작을 하는데, 다들 '그럼 힙합이죠!'라고 대답할 거로 생각하는데, 뜻밖에 많은 아이가 '저는 그냥 랩만 잘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해요.






LE: 와… 그건 정말 충격이네요.


충격이죠. 진짜 되게 많아요. 그러면 저도 '아, 그럼 나한테 왜 온 거야?'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힙합을 좋아한다고 레슨생도 힙합을 좋아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다 생각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배웠어요. 제가 무언가를 잘한다면 이걸 하고 싶어하는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누구에게 가르쳐 줬을 때는 그에 합당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요. 제가 제 노하우를 알려주는 대신에 제가 생각하기에 양심적인 선 안에서 레슨비를 받는 것이고, 대신 돈을 받은 이상 저는 프로로서 최대한 도와줄 의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힙합적이지 않아. 이게 어떻게 힙합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누구도 미술학원에 다니면 안 돼요. 누구도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예술이야?'라고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냥 그거에요. 랩을 통해서 올바르게 힙합을 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친구 중에서도 (힙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제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싸이퍼에도 데리고 나가고, 기회가 되면 공연 무대에도 세워주고, 공연할 때 한 명의 MC로서 어떤 모습이 멋진 것인지,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이런 정신적인 상태부터 랩을 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들까지 가르쳐줘요.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하게 하는 것이에요. 빨리 레슨을 관두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하지만 각자의 속도는 다르고, 타고난 재능이 다르므로 1대1로 할 수밖에 없는 거고요. 예전에 보며 배웠던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거나 새로 나온 음악도 같이 듣고, 모아서 싸이퍼나 공연도 해요. 물론 저도 인간인지라 잘 가르치지 못한 친구들도 있어요. 저도 하나의 인간이라 몇 달을 했는데도… 그런 친구들에게는 제가 잘못한 거죠. 그런데 한 달만 잠깐 하고 그냥 관두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저도 답답하죠. 한 달만 하면 지식이 갑자기 확 늘 거로 생각하는데, 확실한 것은 이건 예술교육이라는 거예요. 수학이나 영어처럼 한 시간 공부하면 한 시간 어치의 지식이 습득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모르는 거죠. JJK에게 자신의 랩을 들려주고 피드백을 들려주면 갑자기 모든 것이 보이면서 실력이 늘 거라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저는 그냥 레슨생들이 5년을 걸려 습득할 것을 2~3년으로 줄일 수 있도록 확실한 연습법을 가르쳐주고, 올바른 기준선을 제시해주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대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능숙하게 하기 시작할 때 관두게 하는 것이 목표예요. 그런 시기가 오면 저는 말을 해요. '이제 나는 더 알려줄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이제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런 이런 것들밖에 없는데 그래도 계속 할래?'라고요. 만약 하겠다고 하면 이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줄어드니 레슨비도 깎아줘요. 그래서 저는 레슨생이 잘하면 잘할수록 레슨비가 줄어들어요. 장사를 잘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원래 고등 기술을 가르쳐 줄수록 더 비싸져야 하는데… (웃음) 레슨생의 정신적, 스킬적 수준에 따라 상황에 맞춰 유동성 있게 해요. 잘하는 친구는 개인 작업 시간을 위해 레슨 횟수를 줄이기도 하고요. 저는 제 나름의 철학, 타당성과 신념을 지니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전혀 꿀리는 것이 없어요. 물론 저도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제 이득을 위해 등쳐먹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예술교육의 기준선에 따라 올바르게 하려 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하려고 해요.






LE: 힙합과 랩 중 배우고 싶은 것이 다른지에 따라 커리큘럼이 다른가요?


네. 좀 달라요. 그런데 약간 아리송한 경우도 있어요. 레슨생이 '저는 랩만 잘하고 싶어요.'라고 하면서 가지고 오는 가사를 보면 자신이 완전 힙합이고, 자신이 완전 MC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도 있어요. (웃음) 그럴 때는 '너는 그냥 이런 거 하지~'라고 하는데, 그런 건 또 싫대요. (웃음) 무엇이 힙합인지 아직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요. 선생님으로서 어느 정도 알아서 눈치를 챌 필요가 있죠. 사실 힙합이 좋으면서, 본성적으로 힙합을 따르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본성적으로 전혀 힙합적이지 않은데 랩을 잘하고 싶어 온 건지 레슨생 하나하나를 전부 분석해서 그 레슨생의 취향과 분석 결과에 따라 커리큘럼을 만들어 나가다가 궁극적으로는 목표를 다르게 해서 나가게 되는 거죠.






LE: 레슨생들과 싸이퍼를 함께 하신다거나, 레슨생들을 공연에 세우시는 것 역시 처음부터 생각해오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꽤 걸렸어요. 사실 전 앨범을 내기 전부터 레슨을 했었거든요. 네이버 지식인에서 랩 잘하는 방법을 물어보거나 배울 수 있는 곳을 물어보는 질문이 있으면 쪽지를 보내서 '제가 가르쳐드릴게요.'라고 하면서 매우 싸게 했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교육자셔서 그런지 저도 가르치는 걸 좋아해요. 처음부터 애정은 있었지만 레슨 선생님으로서 좋은 기획이나 커리큘럼이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해오면서 저도 경험이 쌓이고 느끼면서 이제 많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에요. ‘이 친구에게는 이런 걸 해볼까?’ 하고 생각해 내는 것도 있고요. 제 레슨에서 취약한 부분을 메꾸기 위한 연구와 구상도 계속 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다른 일로도 많이 바빠 모두 바로 적용하진 못하지만, 천천히나마 계속 적용해 나가고 있어요.






LE: 레슨생 출신 중에 활동하고 있는 래퍼가 있나요?


드렙이요. (웃음) ADV가 된 친구가 몇 명 있어요. 워낙 많은 인재를 필요로 했었기에 드렙와 비페이머스라는 프로듀서가 ADV가 되었어요. 비페이머스는 지금은 ADV가 아니지만… 데뷔한 친구는 아직 없어요. 한때 다른 집단에서 좋은 시선을 받아 같이 할 것 같다가 삶의 리듬이 받쳐주지 않아 못한 친구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 레슨생 중 잘 될 것 같은 친구가 있어요. 근데 또 가봐야 알죠. (웃음) 그게 뭐 쉽나요? 봐야 아는 거죠. 확실히 레슨을 받는 것은 확실히 발전을 위한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지만, 레슨을 받는다고 데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차피 자신의 싸움이거든요. 저는 1주일에 한 번 만나는 요정처럼? (웃음) 가이드를 제시하는 거지, 제가 기회주의적으로 한방에 빵!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는 없죠. 어쨌든 그 단계가 오면 냉정하게 레슨생이라는 타이틀도 없고, 실력으로만 평가받게 되니까요. 저는 단지 도와줄 뿐이죠. 어쨌든 제 레슨생이고 도와주고 싶고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도 좀 따져요. 믹스테입을 내려는 레슨생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그런 것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싱글을 내려는 친구에게는 싱글을 내고 정산을 받는 순간 프로의 기준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거든요. 레슨에 있어서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형이 되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데뷔가 효과적으로 되고 하진 않아요. 그건 확연한 차이가 있어요.






LE: 이번에 국제예술원이라든가 랩을 가르쳐주는 학교들이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는 제의가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저는 매우 하고 싶거든요. 저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레슨을 하는 다른 여타 래퍼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단지 요청이 없어요. 제가 신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 아닌 외곽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락이 없어요. 저는 알거든요. 많은 래퍼가 돈을 벌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레슨을 시작하는 걸… '아, 음원으로만 돈 벌 수 있다면 레슨 빨리 때려치우고 싶어.'라고 하는 래퍼가 많아요. 저는 돈을 천만 원을 벌건, 1억을 벌건 시간이 된다면 계속할 거예요. 저는 되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가르치는 것에 대해 연구를 하니까 확연히 자신이 있어요.






LE: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랩 실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많이 받으시지만, 비트 선택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앨범에 피처링은 다양하게 받으시지만 비트메이커는 일정한 라인업이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웃음) 우선은 지금까지 비트를 받았던 비트메이커들에게 미안한 감은 있지만, 외부에서 판단했을 때 비트가 좀 약하다는 의견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이게 헤이터들의 반응이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약한 부분이구나.’하고 인정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받은 비트들이 개인적으로까지 약하다고는 전혀 생각 안 해요. 제가 랩을 할 때 너무 편하고, 제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에 대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줘서 불만이 없는데,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루피는 앞으로 JJK라는 아티스트가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조금 더 이름 있는 프로듀서들에게 양질의 비트를 받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동의는 하는 편이에요. 물론 욕심도 있고요. 하지만 언제나 아귀가 안 맞아떨어지는 게 제가 노력은 하고 있지만, 기존 프로듀서들에겐 죄송하게도 제 작업 방식이 너무 이기적이에요. 프로듀서의 작품관이나 작업 방식을 너무 배려를 안 해줘요. 저는 비트를 받기만 하면 90% 이상의 확률로 제가 무조건 쓰거든요. 그런데 그 시기가 2년이 지나기도 해요. 제 작품 색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빠지게 되니까요. 그런 건 사실 좀 예의가 아니잖아요? 받았는데 안 쓰면… 그리고 중간과정도 전달을 잘 안 해주는 편이거든요. ‘쓰고 있어?’라고 먼저 물어오면 ‘작업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순서가 안 왔어요~’ 정도로는 말은 해주는데 미안하더라고요. 프로듀서의 작품세계가 개입되면 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며 이질감이 들고 하는 것에 민감하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너무 배려심이 없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미안해서 기존 프로듀서들과 잘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나마 [비공식적 기록 Ⅱ]를 작업하면서 조금 바뀌었어요. "별걱정"이라는 트랙을 일립스(Illipse)라는 프로듀서와 작업했는데, 그게 처음에 들었을 때는 루프만 있었거든요. 랩을 그 위에 해 놓고 후반 작업을 시작했어요. 중간중간 변형이 되어가는 과정을 계속 주고받으며 제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반영을 해서 작업을 또 해주고, 그러면서 비트 자체가 훨씬 풍부해졌어요. 이런 방식의 작업을 제가 처음 해봤는데, ‘이런 작업도 나쁘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작업도 더 해보고 싶어졌어요. 확실히 제 발전을 위해서라면 제가 놓아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좀 내려놓고 경험을 더 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랩은 오래 해왔지만, 워낙 외곽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못 받으며 혼자서 해온 경력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작업에 있어 경력의 길이에 비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그런 것들은 좀 더 마음을 열고 개선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LE: 본인의 랩 스킬이 지금까지 시기별로 어떻게 변해왔다 생각하시나요?


예전 작품일수록 여러모로 정리가 잘 안 되어있었어요. 저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 듯이 화가 나 있고, 라임도 어수선하고, 글자도 많이 욱여넣는 면이 있었어요. 지금 그 시절 랩을 지금의 스킬로 직접 불러보면 훨씬 더 멋지게 부를 수는 있겠는데, 글자가 너무 많아 리듬이 깨지더라고요. 성격이 급해 빠르게 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 있잖아요? 그런 스타일에서 차츰 속도를 줄여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음절 수도 줄이고, 라이밍의 배치도 너무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스킬적으로는 [D-League] 때와 [왕처럼 주인처럼]을 지나 [재] 시절까지가 그런 과도기였어요. 당시의 평이 좋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재] 시절부터 조금씩 차분하게 랩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플로우도 안정적이게 되고, 라이밍도 안정적이게 표현이 되고, 리듬에서도 그루비하게 표현하려는 성향이 덧붙여지면서 [도착] 때까지 쭉 이어졌어요. 그리고 [도착] 때 얻은 모든 종합적 스킬들을 과하게 힘을 주지 않고서 편하게도 구사할 수 있게 된 게 [도착 후]와 [비공식적 기록 Ⅱ] 때에요. 종합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적인 면들에 의식적으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또, 반면에 복잡한 어려운 기술적인 면은 좀 떨어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역으로 이제 다시 안정된 바탕 위에서 복잡하고 테크니컬한 랩을 해보고 싶기도 해요. 다시 설명하자면 혼란스러운 것에서부터 안정을 가지려고 힘을 쓰다가 이제는 힘을 놓으면서 본격적으로 더 안정적으로 랩을 할 수 있게 된 거라 보면 될 것 같아요. 이런 성향은 아무래도 제 심적인 리듬과도 맞닿아 있는데, 확실히 부인을 만나고 난 뒤의 랩이 모든 면에서 평이 더 좋아요.






LE: 저 역시 JJK 씨의 랩을 들으며 생각했던 부분이 [재] 이전의 작품에서는 JJK 씨가 ‘나 랩 잘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맞아요. 맞아요. 제가 억울함이 많았던 거예요. 피해의식과 보상심리에 대한 것으로 꽉 차 있었죠. 확실히 어떤 문장을, 혹은 어떤 단어를 라임으로 썼느냐를 따졌을 때는 그 당시의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옛날의 JJK가 더 부럽기도 해요. 지금 저는 그런 능력이 어느 정도 떨어졌거든요. 그때의 그런 라임을 연상하는 빠릿빠릿함이 지금도 있다면 더 좋은 랩을 보여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LE: 랩 자체가 발음을 하나하나 꼭꼭 씹어가며 정확히 읽는 것 같고, 라임 하나를 쳐도 타격감 있게, 혹은 연속펀치로 잽을 날리듯 사용하시면서 동시에 개성 있는 플로우도 디자인하신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 세 가지가 래퍼에게 중요한 기본요소라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이런 걸 생각하시고 작업을 하시나요?


네. 그런데 사실 전 제 발음이 약점이라 생각해요. 제가 저 자신을 보았을 때, 발음적인 측면보다는 사운드적인 측면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가끔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다 발음이 부정확해지거나 전달력이 떨어지게 되는 부분이 확실히 있어요. 그런 의견이 많기도 하고요. 사실 제 발음이 약해서라기보다는 제가 가사를 쓰는 스타일이 가사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려는 성향이나 단순하지 않은 플로우와 라이밍으로 풀어내려 하는 성향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요. 발음 자체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꼭꼭 씹어 발음하는 성향이 예전에는 너무 과해서 자음이 딱딱해지면서 시원한 리듬감을 주지 못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런 건 아까 말했듯이 랩에 힘을 빼게 되면서 조금 부드러워지고 많이 나아졌다 생각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취향을 따라 계속 진화하겠죠? 좋게 평가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감사드리고요. ‘JJK 구리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LE: 저는 개인적으로 발음왕이라고 하면 씨잼 씨라고 생각했는데요.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며 JJK 씨의 작품들을 쭉 들어보는데, '원조 발음왕이 여기 있었네.'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씨잼 발음 엄청나게 좋죠. 옛날로 가면 갈수록 제 발음이 더 좋았긴 했던 것 같아요. 발성도 그렇고, 발음도 그렇고, 한글적인 요소에 대해 더 많은 욕심을 냈었어요. 소리도 목을 덜 쓴 상황이라 허스키하지 않고 더 또랑또랑하게 목소리가 나오던 때라 사운드의 깔끔함으로 따지면 예전이 더 좋긴 해요. 이제는 스킬적인 면모나 자유로움, 안정성적인 면모로 상충해 나가고 있는 거죠. 씨잼은 정말 발음이 좋죠. 발음이 딱딱 잘 나와요. 다른 느낌의 발음이지만 발음 정말 좋은 사람은 허클베리피 형인 것 같아요. 공연에서 가사가 다 들리거든요. 진짜 발음이 자연스럽게 좋은 편인 것 같아요. 또, 발음 좋은 래퍼들 많죠. 확실히 플로우가 그 문장의 어휘력을 받혀주느냐에 따라 발음이 전달되느냐가 크기 때문에, 랩에 있어 발음이 좋은 것과 전달력이 좋은 것은 밀접한 관계이면서도 스타일에 따라서는 아예 관계가 없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선생님처럼 이야기했네요. (웃음)






LE: 여러 번에 걸쳐 기독교적인 가사를 쓰신 적이 있어요. 신실한 신자이신가요?


저는 100% 믿어요. 이 이야기가 인터뷰로 나오면 또 말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제가 기독교 래퍼라서 절 싫어한다는 사람까지 봤거든요. 'JJK는 다 좋은데 개독이라서 안돼!' 하는 것도 봤는데… (웃음) 어쩔 수 없어요. 제 믿음이에요. 제가 한국힙합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말씀과 신앙으로 많은 것을 제게 알려주셨어요. 제게는 그냥 1%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 존재하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신실하냐,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방황의 시기를 겪었고, 너무도 멀어졌던 때도 있었죠. 멀어진 상황에서도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잃지는 않고 있었지만… 신이지만 한 명의 인간처럼 또렷한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 말씀을 너무 어기며 산 적도 있었고, 심지어 요새는 매주 교회를 잘 나가지도 못해요. 지방 공연이 있는 경우도 많고, 교회의 텁텁한 공기 때문에 부인이 입덧을 하기도 해서 많이 빠지기도 했고요. 많이 멀어져 있다가도 또 열심히 다니다가 가끔은 다시 멀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어떤 삶의 경로에 있건 저의 가장 중심에는 신앙이 있어요. 그래서 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거예요.






LE: 인터뷰가 막바지입니다. 저희 힙합엘이에는 자주 오시나요?


힙합엘이는 자주 갈 수밖에 없죠. 당연히 자주 가는 거고, 개인적으로 자막 뮤직비디오를 올라오는 대로 다 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게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 힙합엘이에 가면 언제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는 사이트에요. 심심할 때 외국힙합 뉴스나 단신을 읽기도 하고, 윅엘이(WeekLE)가 생겼잖아요? 힙합엘이의 측면에서는 한국힙합을 어떻게 보고 있나 해서 보고 있어요. 레슨을 할 때도 많은 정보가 있기 때문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고요. 예전에 힙합엘이에서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주고 했었는데, 그 당시 받았던 자료들을 레슨 때 정말 유용하게 잘 썼어요. 특히 케이알에스원(KRS-One)이 했던 특강의 영상은 아직도 레슨에서 힙합을 알려줘야 할 경우에 꼭 보여주는 영상이기도 해요.






LE: 요즘은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시는지 궁금해요. 조금 거센 스타일을 좋아하실 것 같기도 한데요.


제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너무 바빠졌어요. 결혼 후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작업만 해도 엄청나게 빠듯해지고 영감을 얻으려고 하는 시간조차도 많이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다른 래퍼들보다는 훨씬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제 음악의 퀄리티가 떨어지진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저는 ADV의 동생들에게 추천을 많이 받아 들어요. 다행인 건 ADV 멤버들의 취향이 큰 테두리로 봤을 때는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전부 달라요. 저희 멤버가 13명 정도가 된단 말이에요. 13명의 도서관을 다 뒤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서로 좋다고 생각하는 곡들의 리스트를 전부 한곳에 모아 공유하고 있어요. 스쿨보이 큐(ScHoolboy Q), 빅 멘사(Vic Mensa),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와 같은 래퍼들의 유명한 작품들은 다 듣고 좋아하고 있어요. 특히 스쿨보이 큐 같은 경우는 ‘이렇게 재미있는 소리로 재미있는 플로우를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요. 빅 멘사 같은 경우는 정서적인 거라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 와 닿았어요. 근본적으로는 제이콜(J.Cole)의 가사와 그런 분위기를 제일 좋아해요. 제이지(Jay Z)와 칸예 웨스트(Kanye West), 혹은 그 밑의 빅션(Big Sean) 같은 래퍼들을 좋아해요. 그중에서 꼽으라면 제이콜이고요.






LE: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한데요. ADV로서, JJK로서, 남편으로서도 좋고요.


계획이야 많죠. 계획 없는 래퍼가 있겠어요? (웃음) 다른 래퍼들과의 차이라면 저는 가정이 있다 보니 가정에 맞춰 커리어를 설정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찌 되었든 가정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8월이 출산예정일이라 그 앞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마 작업이야 가사 쓰는 것이나 녹음 자체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멀리 가는 공연이나 큰 공연은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기획해서 준비해야 하는 큰 이벤트들도 피하고 있고요. 그래서 오히려 그전까지 최대한 누리려고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지금 꼭 하고 싶은 건 스트릿 랩 앁 2014, 줄여서 ‘SRS 2014’를 하고 싶어요. 이번 목표는 저번에 가보지 못했던 도시들, 특히 제주도를 꼭 가고 싶어요. 더 재미있는 일들도 벌이고 싶고요. 제 앨범도 준비 중이고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속도가 안 나와 속상한데, 어쨌든 출산일보다는 더 일찍 나올 거예요. 어떻게든 최대한 맞춰 진행할 생각이고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인생의 리듬과 딱 알맞은 이야기가 담긴 앨범이 될 거고요. 어떻게 보면 이 앨범에 담기는 제 이야기가 저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 잘 안 팔릴 것 같기도 해요. (웃음) 그런데 가장 의미 있고 멋진 작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요. 아무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요. 정말 저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ADV 역시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ADV의 다른 멤버들도 개별적으로 다들 뭔가를 하고 있고, 얼마 전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라도 더 조심스럽게, 더 완전한 걸 내려고 하고 있어요. 저도 경각심을 갖고 더 많이 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요? ADV 잔치는 당분간은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올해 말? 그리고 또 모르죠. 타이밍이 잘 맞으면 ‘ADVMC’가 또 있을 수도 있고요. 그 외에도 행보적인 면이나 제가 하는 음악의 프로모션적인 면에서도 색다른 것을 계속 궁리하고 있어요. 해낼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촉박한 시간 내에서도 계속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LE: 혹시 질문에 없어서 하지 못한 말이 있으시다면 해주세요.


음... 뭐가 있을까? 우선 인터뷰가 정말 길어졌는데, (웃음) 이 인터뷰에 담긴 모든 내용은 그냥 JJK라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외곽에서, 어떻게 보면 제삼자에 가까운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생각한 내용이 많아요. 또,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도 많으므로 이걸 보신 분들이 제 이야기가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를 통해 (힙합에) 애착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모르셨던 분들은 이 기회를 통해 저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고요. 어떻게 보면 제가 이 뮤직살롱(Music Salon) 이라는 코너에 인터뷰하게 된 일도 제가 느끼기엔 의외의 일이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리고 제 생각들을 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LE: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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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글 | Melo, Bluc, Twangsta

인터뷰, 사진 | ATO, Twangsta,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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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유자차추천 신고 댓글

4.3 18:37 변방이라는 단어가 JJK를 참 잘 나타내는 단어인 것 같네요. 인터뷰 잘 봤습니다

HipHop추천 신고 댓글

4.3 18:37 되게 기네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MC 중 하나인 JJK!! 잘 보겠습니다 :)


Chocoman추천 신고 댓글 4.3 18:54 우와... 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홍대가서 싸이퍼에 '참여'하는 상상을 랩 처음할때부터 했었는데 이제는 슬슬 진짜 홍대에 갈 나이가 되는 것 같네요!! 저도 1집부터 다 돌린 인생을 아는사람입니다! 그리고 팬이죠! 제일 처음보러갔던 공연에서 제제케이님과 투빅토리크로스하고 사진도 찍었었어요 항상 리스펙합니다! 한국힙합 페이보릿엠씨입니다 샷아웃!

Asyourmind추천 신고 댓글

4.3 18:56 서출구는 아예 안나오나요


MoveCrowd추천 신고 댓글 4.3 20:19 삼국지로 치면 마등, 올티는 마초.

justclothes추천 신고 댓글

4.3 20:26 와 다읽었어요 진짜 존경합니다

미미월드추천 신고 댓글

4.3 23:59 진짜 존나 멋있는 랩퍼...

끼끼추천 신고 댓글

4.4 00:56 멋지다 진짜

댈러스추천 신고 댓글

4.4 02:40 2시간 30분이나 걸려서 겨우 다 읽었네요. 읽으면서 힙합이라는 문화가 뭔지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활동 기대합니다.

kkun82추천 신고 댓글

4.4 04:15 이야 이런 인터뷰를 올려주시다니 만드신 분들 고생 많으셨겠네요 잘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shadyaftermath추천 신고 댓글
1 4.4 06:30

와 잘봤습니다 알찬인터뷰

고진감래추천 신고 댓글

4.4 18:11 진짜 좋은 정보 =D 잘봤습니다. JJK님 멋있으세요

아세톤한사발추천 신고 댓글

4.7 11:09 결국 Soul Connection에 관한 얘기는 안나오는군요.

NeutralMan추천 신고 댓글

4.20 14:24 I Love JJKing


Slim shady♥추천 신고 댓글 5.25 22:10 예쁜 아들딸 낳고 행복하세요!! 노래 정말 잘 듣고ㅇㅅ습니다!

Espionner추천 신고 댓글

7.17 13:41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여전히 외곬이지만 JJK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없죠. 제일 멋있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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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https://hiphople.com/interview/2035246?page=10